현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39.122.145.4(토론)의 30151865판 편집을 되돌림
태그: 편집 취소 되돌려진 기여
26번째 줄:
[[고려 안종|안종 왕욱]]과 [[고려 경종|경종]]의 계비 헌정왕후의 사통으로 출생하여 암살 위기를 모면하고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5촌 조카이자 이종사촌 형인 [[고려 목종|목종]]이 폐위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거란]]의 두 차례 침입으로 피난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비극적인 초년 시절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침착하게 대처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또한 전후 고려의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정변 이후 쇠약해진 왕의 힘을 키우기 위해 지방세력을 규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끌었고,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현종 재위 후 고려의 독자적 해동천하 세계관이 급격히 확장 되었으며, 당대에는 문종과 더불어 고려 최고의 성군으로 찬양받고 신격화 되었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려의 위대한 군주로서 제사에 모셔졌으며 오늘날에는 광개토태왕,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사 최고의 군주로 평가하는 관점도 더러 있다. 오랜 [[여요전쟁]]의 여파로 여럿 소실된 [[고려실록]]을 재편찬하고, [[고려대장경|초조 대장경]]을 간행하였으며 교종 대사찰인 [[현화사]] 건립을 지시하였으나, 역시 [[유교]]의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조성도감]]을 설치하여 1029년 8월, 재위 20년에 23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아올렸다. [[1011년]] [[8월]] 재위 2년 째에는, [[개경]]의 황성을 증축하고 [[고려 태조]]의 뜻을 받들어 장락궁에 새로 황성을 쌓았다.
65번째 줄:
 
[[1031년]]에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 (고려)|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 '''그가 미친 영향''' ===
《고려사 숙종 세가》12월 기사의 12)번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2) 용천: 발해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용천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안현 동경성(東京城)이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24019&categoryId=62161&cid=62131&mobile
 
이는 귀주대첩 이후 여진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된 거란의 요나라가 옛 발해수도인 상경용천부까지를 고려의 북방영토로 인정하는 기록으로, 이 기록이 의미하는 바 현종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 외침의 극복이 아닌 독자적인 해동천하 세계관의 확립과 강토의 확장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당대에 편찬한 역사서인 《고려실록》이 실전 되어 정확한 고려인들의 영토 관념을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오히려 적국 거란에서 생각했던 영토 관념이 명확히 기록돼 있기 때문에 의미하는 바가 더욱 크다.
 
귀주대첩 이후 동아시아 질서는 현종에 의해 재편 되었다. 668년 (구)고려의 멸망 후 정확히 30년 뒤 만주에 그대로 재건되었던 (북)고려. 즉 발해의 멸망 후, 그 유민이었던 만주의 수많은 여진 세력과 소국들이 귀주에서의 신화적인 대첩을 직접 지켜본 뒤 때로는 고려의 호적에 등록되고 때로는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기를 계속한 세월이 무려 100년 이상 지속된 시기였다. 이 위대한 승리로 고려는 옛 (구)고려 광개토태왕 때의 영광을 되찾았고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웠으니 그 새로운 질서 개편의 중심에 섰던 두 임금이 바로 고려 제국의 성스러운 대왕이자 해동의 유일한 천자로 칭송 받았던 현종과 해동천하 최고 번영기를 이룩했던 그의 3남 문종이었던 것.
 
따라서 현종과 문종은 단순한 수성의 군주가 아니라 그야말로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도 황금기 제국의 강역을 드넓혔던 정복과 확장의 군주로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문종은 동여진 번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실제로 3만 대군을 출정시켜 정벌을 단행하였다) 당대 고려인들이 남긴 평가를 보더라도 이들에 대한 찬양의 정도가 광개토태왕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신격화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광개토태왕 역시 이토록 위대한 군주로 재평가 된 것이 불과 100년 전후라고 보았을 때 지금이라도 서서히 재평가가 들어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 가족 관계 ==
줄 346 ⟶ 333:
<references />
{{고려의 국왕|대수=8|전임자=[[고려 목종|목종]]|후임자=[[고려 덕종|덕종]]|임기=[[1009년]] ~ [[1031년]]}}{{고려의 왕자}}{{고려의 역대 국왕}}
{{전거 통제}}{{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기본정렬:현종,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