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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사무일'''(재위:{{llang|bg|Самуил}}, [[976년958년]]~[[1018년1014년]])은 불가리아의 군주이다.
 
== 초기생애 ==
그는 마케도니아 프릴레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인 코미타 니콜라는 원래 [[불가리아의 페타르 1세|페타르 1세]] 때의 대귀족이었다. 그러나 969년 [[스뱌토슬라프]]의 내습으로 불가리아가 위기에 처하자 소피아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했다. 970년 니콜라의 사후 네 아들인 다비드, 모세, 아론, 그리고 사무엘사무일(즉 코미토풀리 형제)이 유력자가 되었는데, 이때 스뱌토슬라프가 비잔티움에게 패하여 러시아로 돌아가던 중 암살되고 [[보리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잡혀가게 되자 이들은 반(反) 비잔티움 항쟁을 일으켰고 황제 [[요한네스 1세]]와 싸워 승리하였다. 그후 [[976년]]에 이르러서 그의 형제인 다비드와 모세가 [[왈라키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아론이 비잔틴과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사무엘과사무일과 전투 끝에 아론의 아들 [[이반 블라디슬라프]]를 제외한 아론의 가족 전원이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어 보리스 2세가 살해됨으로서 사무엘은사무일은 불가리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업적과 죽음 ==
그 후 [[980년]] 불가리아의 차르로 정식 즉위한 뒤 [[모에시아]]를 되찾고 [[알바니아]]와 [[테살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고 나서 [[992년]] 수도를 [[스코페]]에서 [[오흐리다]]로 천도하고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부활시켰고, 980년대에 [[바실리우스 2세|바실리우스 2세 불가톡누스]]를 격파한 뒤 그는 발칸 반도에 남슬라브 통일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 세르비아를 멸망시키고 나렌타인들까지 굴복시켰지만 그 꿈은 사무엘이사무일이 [[트라키아]]와 크로아티아에 입성하기 전에 깨졌다. [[소아시아]]에서의 싸움을 끝낸 바실리우스 2세가 [[발칸 반도|발칸]]에서 사무엘과사무일과 싸움을 재개하였고, [[997년]]부터 지루하고 참혹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1014년]] [[7월 29일]] [[벨라시차 전투]]에서 사무엘은사무일은 완패하였고, 그는 겨우 오흐리다로 귀환하였으나 곧 바실리우스가 귀환시킨 포로들을 보고 경악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15,0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100단위로 나누어 앞장 선 자만 눈 하나를 뽑고 나머지는 모두 눈을 뽑아서 보냈고, 그 끔찍한 행렬을 보고 사무엘은사무일은 결국 기절해서 죽었다. 그 후 아들 가브릴은 [[1015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던 중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암살당했고, 이반 블라디슬라프도 [[1018년]] 전사하였으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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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853~889}}
 
[[분류:불가리아의958년 역사태어남]]
[[분류:1014년 죽음]]
[[분류:불가리아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