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고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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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고복림(高福林)
|집성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인물= [[고운 (조선)|고운]], [[고맹영]],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고석진]], [[고광순]], [[고광만]], [[고재필]], [[고재호 (1913년)|고재호]], [[고재청]], [[고재득]], [[고중석]], [[고영주]], [[고영한]], [[고용진]], [[고아라]]
|년도=2015
|인구=114,05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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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고씨'''(長興 髙氏)는 [[전라남도]] [[장흥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고중연'''은 [[제주 고씨]] 1세조 고말로(高末老)의 10세손으로 [[고려]] 말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고려]]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다.
 
== 역사 ==
장흥 고씨의 시조 '''고중연'''(髙仲橼)은 [[제주 고씨]] 중시조인 고말로(髙末老)의 10대손이다. 고중연이 [[고려]] 말기에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고려 공민왕]]을 호종하여 [[경상북도]] 지역으로 피난하였다.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지고봉해졌다고 후손들이 장흥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한다.<ref>{{웹 인용
|제목=장흥 고씨 (長興 髙氏)
|url=http://www.surname.info/go/jang_heu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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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1세조기세조 고복림(高福林)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 아들 [[고합]](高合)은 지영주사(知寧州事)를 지냈다.
 
[[고경명]](高敬命) 일가의 충효(忠孝)ㆍ절의(節義)ㆍ의열(義烈)은 높이 살만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선조|선조]]는 이들 일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광주 사당에 포충(褒忠)이라 사액하고, [[고경명]](高敬命)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 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효열(孝烈), 아들 [[고인후]](高因厚)에게는 예조 참의(禮曹參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의열(毅烈)이라 하였다.
 
[[장택 고씨]](長澤 髙氏)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둘째 아들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가 순국(殉國)하자, 자손들이 고경명(高敬命)의 배위 정경부인 [[울산 김씨]](蔚山 金氏) 슬하에 의지하다가 고인후(高因厚)의 처가가 있는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에 이거하여 살면서부터 학봉파(鶴峯派) 후손들을 '''[[창평 고씨]]'''(昌平高氏)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지방 집안을 말할 때 '기고박이정(奇高朴李鄭)' 이란 말이 있는데, 이들 집안이 지역 명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행주 기씨]](幸州 奇氏)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장흥 고씨(長興 髙氏)의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충주 박씨]](忠州 朴氏)의 사암(思菴) [[박순]](朴淳), 광산 이씨(光山 李氏) 필문(篳門) 이선제(李先齊) 동암(東菴) 이발(李潑). [[연일 정씨]](延日 鄭氏)의 송강(松江) [[정철]](鄭澈) 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장흥 고씨(長興 髙氏)도 그 중의 하나이다.<ref>{{저널 인용
|저자=조용헌
|제목=<nowiki>[한국의 명가 명택 10]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 - 전남 광주 기세훈(奇世勳) 고택</nowiki>
|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5/25/200505250500007/200505250500007_1.html
|issue=제502호
|뉴스 = 신동아
|연도 = 2001
|작성월 = 7
|쪽=586~601쪽}}</ref>
 
== 인물 ==
=== 조선 ===
역대 인물로* [[고운 (조선)|고운]](高雲), 아들: 고맹영(高孟英),1519년 손자별시문과에 제봉(霽峰)병과로 [[고경명]](高敬命)이급제하여 형조좌랑을 있다역임하였다.
* [[고맹영]](高孟英) : 고운의 아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동부승지·대사간·홍문관부제학·병조참의·이조참의·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 [[고경명]](高敬命) : 1558년(명종 13) 무오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예조참의(禮曹參議) 지제교(知製敎) 독서당(讀書堂)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 와 함께 금산(錦山)에서 순국(殉國)하였다순국하였다. 슬하에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고준후(高遵厚), 고순후(高循厚), 고유후(高由厚), 고용후(高用厚) 6형제와 2녀를 두었다.
* [[고종후]](高從厚) : 고경명(高敬命)의 첫째 아들로 ‘복수의병장’이 되어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여 함께 순절(殉節) 하였는데, 이들 3인을 ‘진주 3장사’라 하였다.
* [[고인후]](高因厚):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금산(錦山)에서 순국(殉國)하였다순국하였다.
* 차녀 노씨부인 : 정유재란 때 순절(殉節)하니 슬하의 두 아들과 딸이 난(難)을 당하여 목숨을 바쳤다.
* 고부립(髙傅立) : 고종후(髙從厚) 아들로 정묘호란때 의병장이다.
* [[고부천]](高傅川) : 호가고인후의 월봉아들. 1615년(月峯)으로,광해군 고인후(高因厚7)의 아들로 조선 중기알성문과시에 문신이며,급제하여 사헌부사헌부장령 장령을등을 역임했다.
* [[고광순]](高光洵) : 호가 녹천(鹿川)으로, 고인후(高因厚)의 사손(祀孫)이며, 조선 말기 의병장이다.
 
=== 근·현대대한민국 ===
춘강 고정주 규장각 직각, 고재필 보사부장관, 고재청 국회 부의장, 고재욱 동아일보 사장, 고재호 대법관, 고중석 헌법 재판관, 고윤석 서울대 부총장, 고문석 한양대 법대학장, 고명승 육군대장, 고재종 전라남도 교육감, 고정석 산업은행장, 고광표 대창운수 대표, 고일석 무등양말 대표등은 월봉(月峯) [[고인후]](高因厚)의 직계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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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예로부터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지방 집안을 말할 때 '기고박이정(奇高朴李鄭)' 이란 말이 있는데, 이들 집안이 지역 명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행주 기씨]](幸州 奇氏)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장흥 고씨(長興 髙氏)의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충주 박씨]](忠州 朴氏)의 사암(思菴) [[박순]](朴淳), 광산 이씨(光山 李氏) 필문(篳門) 이선제(李先齊) 동암(東菴) 이발(李潑)., [[연일 정씨]](延日 鄭氏)의 송강(松江) [[정철]](鄭澈) 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장흥 고씨(長興 髙氏)도 그 중의 하나이다.<ref>{{저널뉴스 인용
* [[고경명]]
|저자=조용헌
* [[제주 고씨]]
|제목=<nowiki>[한국의 명가 명택 10]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 - 전남 광주 기세훈(奇世勳) 고택</nowiki>
|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5/25/200505250500007/200505250500007_1.html
|issue=제502호
|뉴스 = 신동아
|연도 = 2001
|작성월 = 7
|쪽=586~601쪽}}</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