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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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플랑크는 또한 논쟁적인 전쟁 선전의 소책자인 악명 높은 "[[93인의 성명서]]"에 서명했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은 엄격한 평화주의적 태도를 유지하여 거의 투옥에 이르게 되었으나, 그의 [[스위스]] 시민권 덕분에 면책되었다).
1915년, 이탈리아가 아직 중립국이었던 때에
=== 전후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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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기간 동안 플랑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정당인 [[독일 인민당]](Deutsche Volks-Partei)의 당원이 되었으며, 이 당은 국내 정책에 대한 자유주의적 목표와 전 세계 정치에 대한 수정주의적 목표를 열망했다.
플랑크는 [[보통선거]]의 도입에 동의하지
|title=The demon and the quantum: from the pythagorean mystics to Maxwell's demon and quantum mystery
|first1=Robert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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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1930년부터 협회(KWG)의 회장을 맡은 플랑크는 다소 도발적인 스타일로 하버에 대한 공식 기념 회의를 조직했다. 그는 또한 비밀리에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협회(KWG) 연구소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1936년에 그의 협회(KWG) 회장 임기가 끝났고 나치 정부는 그에게 연임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
독일의 정치 환경이 점차 더 적대적으로 변하면서, [[도이치 물리학]]의 저명한 대표자인 [[요하네스 슈타르크]]는 플랑크, [[아르놀트 조머펠트|조머펠트]],
[[파일:Stadtfriedhof Göttingen Max Planck Familie.jpg|섬네일|괴팅겐에 있는 플랑크의 묘지]]
1938년 플랑크는 80세 생일을 맞았다. 물리학회(DPG)는 축하 행사를 열었고, 이 기간 동안 막스 플랑크 메달(DPG가 1928년에 설립한 최고 메달)이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에게 수여되었다. 1938년 말, 프로이센 아카데미는 남아 있던 독립성을 상실하고 나치에 의해 인수되었다([[w:Gleichschaltung|일체화<sub>Gleichschaltung</sub>]]). 플랑크는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항의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주 여행을 다니며 종교와 과학에 관한 연설을 비롯한 수많은 공개 강연을 했으며, 5년후에 그는 [[알프스]]의 3,000미터 봉우리들을 오를 정도로 충분히 건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베를린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 임무가 늘어나면서 플랑크와 그의 아내는 일시적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게 되었다. 1942년에 그는 "내 안에 이 위기를 견디고 새로운 도약의 시작인 전환점을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고 기록하였다. 1944년 2월 베를린에 있는 그의 집은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그의 모든 과학 기록과 서신이
1944년 플랑크의 아들 [[w:Erwin Planck|에르빈]]은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7·20 음모]]로 [[게슈타포]]에 의해
== 종교적 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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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크는 모든 종교에 관대하고 호의적이었다. 그는 루터교에 남아 있었지만 기독교나 성경적 견해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기적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사실이 꾸준하고 확고하게 전진하기 전에 단계적으로 양보해야 하며, 그 완전한 패배는 의심할바 없이 시간 문제이다."라고 믿었다.<ref name="auto">{{웹 인용|url=http://www.adherents.com/people/pp/Max_Planck.html|title=The religion of Max Planck, physicist|website=www.adherents.com}}</ref>
"종교와 자연과학"에서 플랑크는 신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견해를 표현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신격의 거룩함은 상징의 거룩함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단순한 상징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교회 관리인이었고 전능하고 전지전능하며 자비로운 하나님을 (
1944년 플랑크는 "가장 명석한 과학, 즉 물질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원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은 원자 입자를 진동시키고 원자의 이 가장 미세한 태양계를 하나로 묶는 힘에 의해서만 발생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이 힘 뒤에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sub>geist</sub>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신은 모든 물질의 모체이다."<ref>"''Das Wesen der Materie''" [The Nature of Matter], speech at Florence, Italy (1944) (from Archiv zur Geschichte der Max-Planck-Gesellschaft, Abt. Va, Rep. 11 Planck, Nr. 179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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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크는 신의 개념이 종교와 과학 모두에 중요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종교와 과학 모두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신자들에게 신은 시작에 있고 물리학자들에게는 신이 모든 것의 고려의 끝에 있다. ... 전자에게 그분은 기초가 되고, 후자에게 모든 일반화된 세계관의 구성체의 왕관이 된다."<ref>"Religion and Natural Science" (Lecture Given 1937) ''Scientific Autobiography and Other Papers'', trans. F. Gaynor (New York, 1949), pp. 184</ref>
나아가
<blockquote>..."믿는다"는 것은 "진리로
저명한 과학사가 [[w:John L. Heilbron|존 L. 하일브론<sub>John L. Heilbron</sub>]]은 신에 대한 플랑크의 견해를 [[이신론]]적이라고 규정했다.<ref>{{서적 인용|title=The Dilemmas of an Upright Man: Max Planck and the Fortunes of German Science|year=1986|publisher=Harvard University Press|author=J. L. Heilbron|page=198|quote=다른 한편으로, 교회 대변인은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언급을 생략하고 아인슈타인의 유대교보다 더 교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플랑크의 이신론에 거의 열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백합화를 그리고, 개종자를 사용하기 위해 플랑크의 삶의 교훈을 개선하고, 또한 과학의 의인화를 전통적인 신격에 대한 믿음과 연관시키는 것이 유용해 보였다.}}</ref> 하일브론은 나아가 자신의 종교적 계열에 대해 물었을 때 플랑크는 자신이 항상 깊이 종교적이었지만 "기독교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신"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을
== 출판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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