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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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시대 ===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武智麻呂), 후사사키(房前), 우마카이(宇合), 마로(麻呂)라는 4명의4명 아들이 있었다. 이들 형제는 당시 덴무 천황의 손자 나가야 왕(長屋王) 등의 황족이 중심이 된 일파와 대립하였는데, 이것은 [[덴표]] 원년([[729년]]) 나가야 왕의 정변이정변 일어나고 나가야 왕이 자해하는 것으로자해로 끝났다. 나가야 왕의 정변에 대해서는정변은 후지와라 4형제가 자신들의 이복 여동생이자 천황의 비였던 고묘코를 황후로 세운 것에 반대하던 나가야 왕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해석되고해석하고 있다. 왕족 출신이 아닌 자로서 황후가 된 것은 후지와라노 고묘코가 최초였고, 그것은 후지와라 씨의 지위를 높여주었을높였을 뿐 아니라, 후지와라 씨를 외가로 하고 있던 쇼무 천황에게조차천황조차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받아들였다.
 
이들 4형제는 차츰 무치마로의 후손인 난케(南家), 후사사키의 후손인 홋케(北家), 우마카이의 후손인 시키케(式家), 마로의 후손인 쿄케(京家)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된다. 덴표 3년([[731년]])에는 이들 형제 전원이모두 관인들의관인들 투표를 통해 의정관의의정관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오르는데, 이는 당초 후지와라 씨가 추진했던 후궁 정책에 후히토 이래 율령 편찬 과정에서 쌓아올린쌓은 실적을 토대로 후지와라 씨가 일본의 관료 조직을 장악하게 된장악한 결과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후지와라 쿄케가 가장 먼저 쇠미해졌다.
 
그러나 덴표 9년([[737년]]), 일본을 휩쓴 [[천연두]]로 후지와라 4형제는 차례차례차례로 병사하였고, 이 틈을 타서 황족 출신의 다른 귀족인 [[다치바나 씨]]의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 당나라 유학승인 겐보(玄昉), 견당사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 등이 후지와라 씨의 독주를 막고자 했다. 이는 당시 고묘 황후의 신임을 얻고 있던 후지와라 난케의 [[후지와라 나카마로|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무치마로의 아들의아들 대두로 수그러들었다. 나카마로는 [[덴표호지]](天平寶字) 원년([[757년]]) 모로에의 아들인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제거하고(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독재 권력을 행사했지만, [[고켄 천황|고켄 상황]](孝謙上皇)의 총애를 얻은 승려 도쿄(道鏡)의 대두로 덴표호지 8년([[764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자신도 죽었다(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나카마로의 실각으로 후지와라 씨는 침체기에 빠졌다가, 후지와라 시키케의 후지와라노 요시쓰구(藤原良繼)・모모카와(百川)나 홋케의 후지와라노 나가테(藤原永手)의 조력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이후 난케・홋케・시키케의 세 집안이 경쟁을 벌인 끝에 정쟁이나 일족의 반란 등의 사건을 겪은 난케・시키케가 헤이안 시대 전기에 쇠퇴하면서 홋케가 융성하게 되었고 후지와라 씨의 '본가(本家)'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후지와라 씨의 적류(嫡流)에 대해서는 후히토의 맏아들인 무치마로의 후손인 난케를 적류로 보는 설과, 형 무치마로보다 일찍 출세했던 차남 후사사키의 후손인 홋케를 적류로 보는 설이 있는데, 후사사키가 생전에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이나 쇼무 천황의 신임을 얻으며 할아버지 가마타리가 얻었던 우치노오미(內臣)의 지위를 얻었기는 하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고관의 '적남'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와중에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난케가 후지와라 씨의 적류였다고 보는 설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