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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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12-18}}
{{독자 연구}}
{{구별|한복}}
{{Infobox Chinese|title=한푸<br />漢服|pic=[[파일:Hanruqun.jpg|230px]]|piccap=|picupright=0.45|s={{lang|zh|汉服}}|t={{lang|zh|漢服}}|p='''Hànfú'''<br />'''漢服'''|mi={{IPAc-cmn|AUD|Hanfu pronunciation.ogg|h|an|4|.|f|u|2}}|j=Hon<sup>3</sup>-fuk<sup>6</sup>|ci={{IPAc-yue|h|on|4|.|f|uk|6}}|poj=Hàn-ho̍k|l="한족의 착복"|order=st|pic2=[[파일:Hanfu (Chinese characters).png|80px]]|piccap2=|romanization=Hànfú}}
[[파일:Hanfu movement.jpg|섬네일|350px|한푸 운동]]
'''한푸'''({{zh|order=t|t=漢服|s=汉服|p=hànfú}})는 중국 한장(漢裝)의 새로운 표현이다. 2000년 이후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 [[한푸 운동]]이 일어나 전통의복을 일컫는 용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푸는 본래 느슨한 소매에 허리띠가 있는 긴 가운 형태 의복을 말했다. 최근에는 [[만주족]]의 전통복장인 [[치파오]]와 [[조선족]]의 전통복장인 [[한복]] 등 [[중국의 민족|중국 소수민족]]의 복장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대되고 있다<ref>[https://www.chinahighlights.com/travelguide/traditional-chinese-clothes-hanfu.htm Hanfu — Traditional Clothing of the Chinese Han Majority]</ref>.
 
== 역사 ==
{{독자 연구 문단|날짜=2021-10-26}}
용어의 어원은 신조어로 구체적인 뿌리는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고서의 기록을 통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삼황오제시기에, 선인들은 새나 짐승의 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나아가 마(麻)를 이용해 베옷(布)을 만들어 입었다. 나중에 [[황제 (전설)|황제]]의 정비(正妃)인 누조(嫘祖)가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치는 것을 시작해 백성들에게 베를 짜고 옷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때문에 복식(服飾) 제도는 황제 시대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친 후 [[관복]] 제도가 점차 수립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은 [[서주]] 시대에 [[주례]] 제도가 형성되어 의관예제(衣冠禮制)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생겼고 관복 제도가 점차 예치(禮治)의 범위 속으로 들어가 예의문화(禮儀文化)를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한푸는 이때에 이르러 더욱 완벽해졌다.
 
일찍이 한 성인께서 “한 왕조의 천자에 한 왕조의 신하, 한 왕조의 천인(天人)에 한 왕조의 백성, 한 왕조의 문화, 한 왕조의 복식.”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 고대의 복식은 단순히 왕조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것만은 아니며 조대(朝代)간의 복식특징에도 아주 큰 구별이 있다. 또한 각자 서로 다른 조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시기의 인류가 부여받은 지혜를 체현하고 있다.
 
=== 상나라 ===
[[상나라]] 때는 [[직기]]와 [[자수 (공예)|자수]]가 발달했는데 최초의 의복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허리에 넓은 요대(腰帶)를 둘렀으며 옷깃(領襟), 소맷부리(袖口)에 모두 정교하고 치밀한 자수 장식을 했다.
 
=== 주나라 ===
[[주나라]] 때는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고 의관제도도 점차 완비되었다. 당시에는 신분의 구별이 심했기 때문에 복식 중에서도 관복등급의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제왕]]과 귀족은 모두 장소와 신분에 따라 적당한 복식을 입어야 했다. [[춘추전국 시대]]에 들어와 ‘심의(深衣)’가 나타났다. 심의는 위아래를 나누어 재단한 후 중간 부분을 이어서 만드는데 재단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연결되어 있다. 심의는 용도는 광범위하여 남녀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입을 수 있었으며 당시에 크게 유행했다.
 
=== 진·한 시대 ===
[[진나라]] 때 중국이 통일된 후 각종 제도가 새로 창립되었으며 그중에는 자연히 관복제도를 포함한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았는데 [[전한 무제|무제]] 때 서역과 문화교류가 강화되면서 복식의 색채가 더욱 다양해졌다. 한나라 때 성행한 복식은 온몸을 감싸는 포(袍) 위주였고 양식은 소매가 큰 것이 많다. 어깨부터 직통으로 발까지 내려가는 긴 장포(長袍)는 당시 가장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한나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생활도 부유해졌고 의관(衣冠)과 복제(服制)도 날로 화려해졌다. 한나라 때 귀족의 예복은 치마(裙襬), 옷깃(領口), 소매(袖口)에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운 테두리로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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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n Yang Ling 32.JPG
파일:Han Yang Ling 33.JPG
파일:Han Yang Ling 38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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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진남북조 시대 ===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해 남방과 북방의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타향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섞여 거주하는 상태가 나타났고 또 호한(胡漢)문화도 서로 영향을 끼쳤다. 포의박대(褒衣博帶 크고 헐렁한 옷에 넓은 띠)는 이 시기에 유행하던 복식으로 자연스럽게 본성을 따르면서 느슨한 복장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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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leshenfu.jpg
파일:魏晉墓磚畫 採桑圖.jpg
파일:Paintings in Xu Xianxiu Tomb 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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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시대===
[[수나라|수]]·[[당나라|당]]시대에 나타난 화려하면서도 귀족적인 복식은 당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 공전의 번영을 누린 전성시기임을 잘 반영한다. 염색 및 실크 직조(織造) 기술이 크게 진보하고 실크로드의 개통 및 대외개방으로 [[쿠처]], [[남조 (왕국)|남조]], [[토번국|토번]],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 사자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가져왔고 이 시기 당나라 복식이 다양한 민족의 특색을 융합해 크게 이채를 띨 수 있게 했다. 당나라의 염색기술은 아주 뛰어났으며 실크 제품의 염색문양은 전대미문의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당나라 복식의 재료를 연구해보면 색채가 곱고 선명하며 양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액세서리도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당(大唐)의 복식은 호탕하면서도 대범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해 유구한 중국 복식의 역사 중에서도 휘황찬란한 최고봉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남자들의 가장 전형적인 복장은 원령(圓領 둥근 깃)에 포삼(袍衫)을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사모 (모자)|사모]](紗帽)를 쓴 것이다. 복두란 사견(紗絹)으로 만든 사각형 두건(頭巾)을 말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좌우에 각(角)을 부착한 모양으로 당나라 때 아주 유행했다. 당나라 여인들은 미를 추구하는 풍조가 성행해 화장, 눈썹그리기, 입술 단장을 중시했으며 연지 찍기를 좋아했다. 복식의 특징은 옷깃이 낮게 내려가고 소매가 크며 치마허리를 높이 묶었다. 주요한 양식은 위에는 짧은 저고리(襦)나 적삼(衫)을 입고 아래는 긴 치마(裙)를 입었으며 반비(半臂 소매가 없거나 짧은 겉옷)를 입고 어깨에는 피백(披帛)을 둘렀다. 긴 치마는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몸 자태는 마치 천선(天仙)처럼 유연하고 세속을 초월한 듯한 고아(高雅)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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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igures in a cortege, tomb of Li Xian, Tang Dynasty.jpg|
파일:Court Ladies of the Tang.jpg|
파일:Anonymous-Astana Graves Dancer.jpg|
파일:Li_Xian%27s_tomb,_ambassadors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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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 ===
[[송나라]]의 의관복식은 당나라의 전통복제를 답습하긴 했으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성리학]]을 숭상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存天理,去人欲)’한다는 관념을 제창하면서 전통의 보수적인 도덕관을 이끌었다. 이런 영향 때문에 복식도 더 이상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고 간단하며 소박한 것이 위주가 되었다.
 
송나라 남자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각종 장소에서 모두 박두(幞頭)를 썼다. 단, 이때의 박두는 비교적 모자와 비슷한 모양의 직각 관모(冠帽)였다. 복식은 둥근 깃을 위주로 다양한 색상의 포삼(袍衫)으로 등급을 구분했다. 송나라 귀족 여인의 예복은 대수삼(大袖衫 소매가 큰 적삼)이었다. 송나라는 주(周)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제사 등 중요한 장소에서는 반드시 예복(禮服)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일반 평민 여인의 복식은 상의에 유(襦), 삼(衫), 오(襖), 대수(大袖), 반비(半臂), 배자(褙子 조끼) 등을 입어 양식이 다양했고 아래에는 치마(裙子)를 입었다. 이중 배자는 당시에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유행했던 복식으로 외투의 일종이며 직령(直領 곧은 깃)과 대금(對襟 웃옷의 두 섭이 겹치지 않고 가운데서 단추를 채우는 맞깃),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것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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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蠶織圖局部5.jpg|
파일:蠶織圖局部2.jpg|
파일:蠶織圖局部3.jpg|
파일:雜劇人物圖.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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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
원나라에서 유행한 고려풍 복식의 영향이 명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홍치제]] 시기에 들어서야 고려양(高麗樣)이 원래 중국 풍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명나라]]는 관복제도에 있어 주(周), 한(漢), 당(唐), 송(宋)의 복제를 참조해 전통적인 한족의 복식제도를 회복했다. 명나라의 복식은 재료가 다양하며 특히 자수 기술이 발달했다. 남자의 복식은 포삼(袍衫)을 위주로 했고 관리들의 조복(朝服)은 옛 제도를 답습해 오사모(烏紗帽)와 원령삼(圓領衫 둥근 깃의 삼)을 입었고 소매는 넓어 3척이나 되었다. 포삼의 색과 도안으로 관직의 품위를 구분했으며 포삼 관복의 앞에는 사각형 자수그림이 있었다. 문관(文官)은 날짐승을 도안으로 삼았고 무관(武官)은 길짐승을 도안으로 했다. 비색(緋色 붉은 색) 포삼은 1품부터 4품까지, 청색 포삼은 5품부터 7품까지, 녹색 포삼은 8품부터 9품까지 입었다. 여성복식은 주로 오(襖), 삼(衫), 배자(褙子), 비갑(比甲) 및 치마였고 당송(唐宋)의 양식을 답습했다. 포삼의 색은 진홍색이나 황색, 청색은 사용할 수 없었고 단지 연분홍색, 자색, 녹색만을 입을 수 있었다. 명나라 부녀자의 예복은 봉관하피(鳳冠霞帔)인데, 후비(后妃)가 제사나 대전(大典) 등 중요한 장소에 참가할 때 입던 옷으로 봉관(鳳冠)위에는 용과 봉황을 새겼으며 하피(霞帔 예복을 입을 때 목에 거는 띠 모양의 장식물)와 함께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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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ng dynasty man.jpg|
파일:The Portrait of Koxinga.jpg|
파일:Ming girl1.jpg|
파일:墮胎產亡嚴寒大暑孤魂眾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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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
명나라 멸망후 만주족의 습속인 변발과 의복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였지만, 한족 사대부들을 중용하고 한족의 문화 유산인 학술을 종합정리하는 한편 국가 재정과 제도를 충실히 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문화학술사업을 장려하자, 한족들의 저항도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 역대로 이민족과 한족의 부단한 융합이 결실을 맺으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된 것이다.
 
== 특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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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삼 (襴衫), 여미는 옷으로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가며 무릎 아래로는 치마가 연결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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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