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동음이의 링크
34번째 줄:
[[1283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군대를 보내 [[참파]]를 침공하여 당시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함락시키고 베트남에게 참파 정벌에 동원시킬 병사를 요구하였다. 베트남 측은 이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쿠빌라이 칸은 해로를 통해 베트남 침공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1285년]]에 다시 아들 [[토곤(Toghon 脫驩)]]을 시켜 50만 대군을 이끌게 하여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고, 위급함을 느낀 인종은 쩐흥다오를 국공(國公)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덕망있는 촌로들을 모아 항복을 할 것이냐, 항전을 택할 것이냐를 물었다. {연홍회의(延洪會議)}
 
쩐흥다오가 이끄는 쩐 왕조의 군대는 토곤의 몽골군을 맞아서 열심히 싸웠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수도인 탕롱성이 함락되고 태상황 태종과 인종은 겨우 탕 롱을 탈출해서 타인호아(Thanh Hoa 淸化)로 도망쳤다. 다행히도 이내 다시 전열을 수습해서 탕롱을 점령한 원군을 사방에서 공격해서 수세로 몰아넣었다. 이 때 쩐흥다오는 '''"항복을 결정하셨다면, 일단 신(臣)의 목부터 베어주소서"'''라 말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는 《병서요략(兵書要略)》을 엮고나서 <격장사문(檄將士文)>이란 글을 지었는데, 이 글을 보면 몽골과의 전쟁에 임하는 그의 진중하고 비장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