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귈라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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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귈라를 이전에 노예가 된 아프리카 인을 고용하여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체제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이에 적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농장들은 크게 실패한다. 앵귈라의 인구는 이 때 약 10,000명에서 2,000명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19년에는 유럽인 360명, 노예가 아닌 아프리카인 320명, 노예 2451명이 있었다. {{Sfnp|Martin|1839}} 1830년대, 영국은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농장주들은 그에 따라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자유민들은 농부와 어부로서 앵귈라에서 계속 생계를 유지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가뭄과 기근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섬의 전체 인구를 [[영국령 기아나]] (현재 [[가이아나]][[데메 라라|)의 데메라라]] 로 이주시키려고 했으나 대부분은 남는 걸 선택했다. 19세기, 섬 중앙에 있는 큰 호수에서 소금이 개발되었고 이는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매년 약 3,000,000 [[부셸]]이 생산되었다. {{Sfnp|Martin|1839}} 이로 인해 섬의 주요 무역이 형성되었고 소금뿐 만 아니라 [[설탕]], [[면섬유|면화]] 및 [[담배]] 도 생산되었다. {{Sfnp|EB|1878}}
 
1871년, 앵귈라는 [[세인트키츠섬|세인트 키츠]] 연방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 앵귈라는 영국 식민지 사무소에 분리되고 직접적인 통치를 허용해달라고 청원했다. 이 무렵 인구는 3000명으로 증가했다. {{Sfnp|EB|1878}} 1882 년에1882년에 세인트 키츠 연방에 [[네비스섬]]이 추가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제 1차 세계 대전]] 시절 인구는 3890명까지 증가했다. {{Sfnp|EB|1911}} 그 무렵 [[목탄|숯]] 생산이 이루어지며 섬 전체를 [[탈산림화]] 시켰으나 이로 인해 확장된 목초지는 [[소]]를 [[세인트토머스섬|세인트 토머스섬]]으로 수출하게 해주었다. [[석회 인산염|제3인산칼슘]]도 생산되었다. {{Sfnp|EB|1911}}
 
1951년이 되어서야 앵귈라가 [[리워드 제도 연방 식민지]]의 일부인 [[세인트 크리스토퍼 네비스 앵 귈라|세인트 키츠-네비스-앵귈라]] 의 영국 식민지 행정부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이 3개 국가는 [[서인도 연방]]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