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heoteryi (토론 | 기여)
잔글 Reverted 4 edits by 118.43.202.147 identified as vandalism to last revision by Npsp. (TW)
6번째 줄:
=== 역사 ===
{{참고|미국의 역사}}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776년]] [[7월 4일에4일]]에 독립선언을 한 이래 끊임없이 미국 내부의 개발과 발전을 위하여 전념하여 왔다. 특히 남북전쟁을 치른 뒤에는 급속하게 국력을 확충하여 왔으며, 1898년의[[1898년]]의 미서전쟁(美西戰爭) 이후부터는 세계열강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국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보여 준 바 있지만 [[1929년 10월부터10월]]부터 일어난 [[세계 대공황의대공황]](大恐慌)의 참변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내세워 대공황의 극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전에 참가하는 한편 병기창으로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2차대전이[[2차대전]]이 종결되기 직전에 급서한급서(急逝)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1948년의[[1948년]]의 선거에서도 재선되어 페어딜 정책을 내세워 뉴딜정신을 이었다. 보수주의의 [[매카시즘]](McCarthism)이 대두하자 페어딜 정책의 실현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고 민주당 정권의 부패, 오직(汚職)·비능률이 일어나는가 하면 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기에 이르자 트루먼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1952년 11월]] 공화당에서 출마한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는 사상 최고의 득표를 얻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국전쟁을 종결시킴과 동시에 온건한 내정과 외교를 펴서 국민의 기대에 영합하였다. 1960년의[[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존 F. 케네디가케네디]]가 겨우 당선된 바 있으나 웅대한 뉴프런티어 정책을 표방하였다. 내정에서는 번영·복지·인종 평등을, 외정에서는 미국의 위신 회복과 평화의 실현을 내세웠으며, 특히 [[1962년 10월]] 쿠바위기를 당하여 미·소대립을 크게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웅지를 펴기도 전에 [[1963년]] [[11월 22일에22일]]에 케네디는 암살을 당하였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린든 존슨은존슨]]은 [[1964년 11월의11월]]의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재선되었다. 이때 '위대한 사회' 정책을 내세워 복지국가의 실현을 공약한 바 있으나 베트남전쟁이 치열해지고 달러 위기가 심각하게 되자 국민들의 반전(反戰)감정이 고조되면서 각처에서 반전 데모가 잇달았다. 또한 사회 개혁에 불만을 품은 흑인폭동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존슨의 월남전 확전(擴戰)은 공화당의 닉슨에게[[닉슨]]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문제의 월남전은 끝을 내게 되었다. 그러나 키신저로[[키신저]]로 대표되는 강대국 위주의 외교정책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사건]]으로 집약된 국내 정치의 흑막은 공화당의 집권을 단명화시켜단명화(短命化)시켜, [[197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정치사상 새 막을 열게 되었다. 카터는 정치에서의 도덕과 인권존중을 표방하여 많은 지지를 얻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정치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과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가부시]]가 연어어 집권함으로써 전반적인 정책은 보수·안정적인 기조를 띠었다. 경제적으로는 일단의 혼란기를 거쳐 호황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레이거노믹스]]'라고 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경기부양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미국 경제가 질량면에서 한 단계 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미국은 대외적으로 공산권 세계와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게 되었으며 나아가 구 소련을 위시한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데 직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들어 민주당 출신으로 10여년만에 집권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다져 놓은 국내외적 성과를 기반으로 보다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 나갈 수 있었다. 즉 국내 정치에서 외교분야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보수 안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해 나갔다.
 
그것은 민주당의 기본 정강정책과 클린턴의 개인적인 성향이 결합된 결과였으나 무엇보다 변화를 바라는 미국민의 여망에 부응한 정책이었다. 아무튼 클린턴은 소기의 성과를 올려 재선에 성공한다.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클린턴은 잇따라 터져나온 '성추문사건'으로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여비서 르윈스키의 폭로와 스타 검사의 집요한 공격으로 하원에서 대통령탄핵안이 통과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업적과 여론의 지지율에 힘입어 그의 위상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9번째 줄:
미국의 주요 정당은 [[민주당 (미국)|민주당]]과 [[공화당 (미국)|공화당]]이다. 이 두 정당의 당원이 연방정부, 주정부, 지방정부의 관직을 대부분 차지한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총선은 4년마다 실시한다. 또한 동시에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의 1/3도 뽑는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하원의원의 임기는 2년,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이다. 대부분 주마다 각 정당이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관직에 내보낼 후보자를 지명하는 예비선거를 실시한다. 일부 주는 연방의회 후보자를 지명하는 예비선거를 치른다. 각 당은 전당대회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지명한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지 않고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을 선거인을 선출한다. 그리고 이 선거인으로 이루어진 선거인단이 투표하여 대통령을 선출한다.
 
{{기본정렬:}}===흑인문제===
미국 총인구 2억 4천만 명 가운데 2천 5백여만 명이 흑인이다[[흑인]]이다. 이것은 전체 인구의 약 11%에 해당한다. 흑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원래 흑인들은 노예로서 미국에 온 사람들의 자손들로서 그들 대부분은 미국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많은 흑인들이 미국의 북부 및 태평양 연안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곳에 지역적으로 '흑인 밀집지대'가 탄생하였다. 1900년에만[[1900년]]에만 해도 흑인인구의 90%가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1960년에[[1960년]]에 이르러선 남부에 거주하는 자는 60%로 낮아졌다. 미국이 제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노동력의 부족을 흑인들로 메운 결과, 일부 흑인들은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얻었지만 아직까지도 남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전체의 흑인들은 법률적·경제적·사회관습면 등에서 많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흑인의 실업률은 항상 백인들의 2배를 넘고 흑인 노동자는 "맨 먼저 해고당하고 맨 마지막으로 고용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대부분의 주(州)에서는 흑인은 백인과의 결혼이 법률로써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敎會)에서까지도 흑·백분리가 행하여지고 있다. 흑인의 해방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왕성해졌다. 최초의 대운동은 마커스 가베가 부르짖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이때부터 진보적인 백인과 흑인이 모여 1909년에는[[1909년]]에는 전국 유색인종 향상협회(NAACP)를 창립하고 흑인의 차별철폐 운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1954년에[[1954년]]에 연방 대법원에서 내린 흑인분리교육 위헌(違憲) 판결은 흑인의 권리옹호 투쟁에 있어서 중대한 승리였다. 처음에는 소수의 북부 흑인단체나 몇몇 진보적인 백인이 한정된 투쟁을 벌였던 것이 그 이후부터는 남부 흑인 대중에 의한 투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1957년의[[1957년]]의 리틀 록 고등학교 사건과 1963년의[[1963년]]의 버밍햄 대학사건 등 차별교육 반대투쟁은 때때로 흑인대중과 남부 차별주의자와의 사이에 무력형태의 투쟁으로 번졌다. [[1963년 8월에는8월]]에는 워싱턴에서 '직업과 자유를 위한 행진'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1964년 8월에8월]]에 있었던 뉴욕의 할렘폭동 이래 해마다 '길고 무더운 여름([[케네디 대통령의대통령]]의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수많은 도시의 슬럼가(街)에서 흑인폭동 사건이 발생했다. [[1967년]] 여름에는 디트로이트·시카고를 비롯하여 미국의 각 지역에 광범하게 폭동이 파급되었다. 1950년대로부터[[1950년대]]로부터 [[1963년]] 전반기에 이르는 동안에 흑인차별법이 차차 철폐되고 1964년에는[[1964년]]에는 공민권법(公民權法)이 성립되었지만 오히려 흑인폭동은 한층 광폭화·과격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가령 법률상의 차별이 철폐된다 하더라도 주거·직업·군대 등에서 사실상의 차별은 뿌리 깊게 남아 있어서 흑인들의 불만을 쉽게 해소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흑인운동 단체===
흑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단체는 미국에 수없이 많다. 중요한 것을 든다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온건파 단체로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NAACP有色人種地位向上協會:NAACP), 전국 도시동맹(NUL全國都市同盟:NUL),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끌던 중간파로서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SCLC), 그외 좌파로서 인종평등회의(CORE),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SNCC), [[말콤X]]([[1965년]] 암살됨)의 흑인회교단(黑人回敎團) 등이 있다. 1966년경부터[[1966년]]경부터 흑인운동의 주도권은 블랙 파워를 외치는 SNCC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에게급진파(急進派)에게 옮겨져 갔다. 그러나 백인들과의 협력을 일체 거부하는 급진파들의 태도에 대하여 NAACP 등 온건파들은 이를 반대함으로써 흑인운동 지도자간의 분열은 한층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권부===
39번째 줄:
 
==외교==
외교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대한 주된 책임을 대통령이 지게 되어 있으나, 의회도 이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 의회는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하원은 대통령의 외교정책 수행에 필요한 예산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원도 재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상원의 경우에는 고급 외무적 관리의 임명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체결하는 모든 조약에 대한 비준권을 가지고 있다. 의회의 이와 같은 제재권한은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미국의 정치체계가 외교정책에 있어서 행정부와 의회 간의 투쟁을 초래하였다. 그 좋은 예로서는 상원이[[상원]]이 국제연맹 헌장의 비준을 거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의회와 행정부간에는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엔헌장 비준 당시의 의회와 행정부간의 긴밀한 협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협동외교는 한국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초당외교'라는 말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월남전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행정부와 의회간의 갈등은 심각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의회가 대통령에 가하는 압력은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동시에 건전한 방향의 미국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의 대표기구로서 국민의 의사와 직결돼 있다. 따라서 대외정책의 수립이나 이행 과정에도 항상 의회를 '문제아'로 취급하거나, 또는 그러한 범주내에 의회의 기능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적으로 볼 때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로부터[[고립주의]]로부터 시작되었으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개입주의와 고립주의가 병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창하고, 주도함으로써 고립주의를 탈피하려 했으나, 상원이 국제연맹 헌장의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신고립주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세력균형, 집단 안전보장이라고 하는 3개의 외교노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세력균형 정책이 유럽의 권력 정치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거부되었으며, 집단 안전보장정책은 새로운 것이기는 했지만 미국인들이 세력균형 정책과 집단 안전보장정책을 명백히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그들에게 보다 익숙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고립주의로의 도피를 선택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세계정치에 적극 참여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 새로운 시대의 지도적 위치를 떠맡아, 유엔의 창설과 운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양상이 초래되자, 미국은 유엔이라는[[유엔]]이라는 집단 안전보장체제만으로는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집단 방위체제와 상호 방위체제의 구축에 노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소위 말하는 봉쇄정책이 등장했으며, 이는 구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점차 약화하였으며, '[[닉슨 독트린]]' 이후로 급격히 약화되어 그 형태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카터의[[카터]]의 등장 이후 모든 국가에 대한 여행제한 철폐를 비롯한 개방정책이 적극 추진되고 있으며, 무장에 의한 평화보다 협상을 통한 평화외교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글로벌}}
{{Link FA|sl}}
 
[[분류:미국]]
 
[[bg:Държавно устройство на САЩ]]
[[bs:Politika Sjedinjenih Američkih Država]]
[[ca:Política dels Estats Units]]
[[de:Politisches System der Vereinigten Staaten]]
[[en:Politics of the United States]]
[[es:Política de los Estados Unidos]]
[[fr:Politique des États-Unis d'Amérique]]
[[hr:Politika Sjedinjenih Američkih Država]]
[[it:Sistema politico degli Stati Uniti]]
[[ja:アメリカ合衆国の政治]]
[[lt:JAV politinė sistema]]
[[ms:Politik Amerika Syarikat]]
[[no:Amerikas forente staters politiske system]]
[[pl:Ustrój polityczny Stanów Zjednoczonych]]
[[pt:Política dos Estados Unidos da América]]
[[ru:Политическая система США]]
[[sl:Politika in uprava Združenih držav Amerike]]
[[sr:Политика Сједињених Америчких Држава]]
[[sv:USA:s politik]]
[[vi:Chính trị Hoa Kỳ]]
[[zh:美国政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