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토 아키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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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 아키라는 [[구마모토 현]] 출신으로,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침략의중국 침략의 주도자==
 
무토는 1935년 관동군의 특무부대에 배속되었고, [[이시와라 간지]]가 [[관동군]]을 이끌고 만주를 점령하여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운 것을 흉내내서, 1936년 [[내몽고]]에서도 몽고 귀족인 [[뎀충동그룹]](德王)을 옹립하여 일본의 괴뢰정부인괴뢰 정부인 [[몽고군정정부]]를 수립하려는 공작을 획책했으나, [[푸쭤이]]가 이끄는 [[국민혁명군|국민당군]]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1937년 무토는 관동군 참모부의 제3과 과장이 되어 관동군의 작전, 병참, 조직등을 책임졌다.
 
[[노구교 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흥분하면서 기뻐하였다. 일본 육군내에서는 중국전선을 두고 확대파와 불확대파로 파벌이 갈렸다. 이시와라 간지가 대표적인 인물인 불확대파는 소련을 상대로한 전쟁을 염두에 두고 중국과의 분쟁을 확대하지 않기를 바랐으나, 무토는 확대파로서 중국의 남방으로 확전하기를 주장하였다. 결국 무토의 주장이 내각에 받아들여져,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국과의 협상을 중지하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개시했다.
 
무토는 침략의 입안뿐만 아니라 직접 중국전선에 참모로 참전하여 1937년 8월 [[상하이 사변]]에 참가하였고, 이때 각종 작전을 입안하는 공을 세워 중지나방면군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였고, 이어 [[난징대학살]]이 벌어졌고, 무토 아키라는 부참모장으로서 난징작전을난징 작전을 지휘했고, 중지나방면군 총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에 뒤이어 난징에 입성하였다. 따라서 난징대학살에 책임자중의 하나로 꼽힌다.
 
1938년 7월 무토는 북지나방면군의 부참모장으로 전근되었다. 그리고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 공을 세워 영전하여 일본으로 돌아가 [[1939년]]에 중앙요직인 육군성 군무 국장으로 승진하여 진출했다.
 
==태평양 전쟁==
 
[[1942년]]에는 [[수마트라]]와 [[메단]]에서 근위 제2사단장, [[1944년]]에 [[필리핀]]의 일본 제국 제14방면군의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무토 아키라는 항복할 당시에 [[필리핀]]에 있었지만, [[극동 국제 군사 재판]]으로 인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