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1세 표도로비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Risk34님이 미하일 1세 표도르비치 문서를 미하일 1세 표도로비치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철자가 틀렸습니다
편집 요약 없음
28번째 줄:
|왕조 = [[로마노프 왕조]]
|가문 = [[로마노프가]]
|아버지 = [[이반표도르 안드레예비치니키티치 로마노프 슈이스키]](1553~1633)
|어머니 = [[마르파세니아 셰스토바 표도로브나]](1560~1631)
|배우자 = [[마리아 돌고루코바]]<br />[[에우독시아 스트레시네바]]
|자녀 = [[이리나 미하일로브나]]<br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등
35번째 줄:
|종교 = [[동방 정교회]]
}}
'''미하일 1세'''(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llang|ru|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1596년]] [[8월 31일]] ~ [[1643년]] [[8월 31일]], 재위:16131613년 ~ 16451645년)는 [[1613년]] 젬스키 소보르가 [[러시아 차르국]]을 다스리는 데 자신을 선출한 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며, 그 초대 [[차르]](1614~1645)다가 되었다.
 
그는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와 세니아 셰스토바의 아들이었다. 그는 [[표도르 1세]]의 모친이었던 자신의 큰 이모 아나스타시아 로마노바를 통하여 마지막 [[류리크 왕조]]의 차르 표도르 1세의 오촌 조카이며 결혼 생활을 통하여 [[이반 4세]]의 증조 조카이기도 한다. 그의 즉위는 [[동란 시대]]의 종말을 표시하였다. 그의 통치 동안 러시아는 [[카자크]]와 스트로가노프가의 도움과 함께 [[시베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미하일의 통치가 끝날 무렵 러시아는 [[우랄산맥]]의 부근부터 [[태평양]]까지 확장되었다.
동란시대(1598~1610)을 거친 뒤에 [[1613년]] [[2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에서는 새로운 차르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그 때 선출된 사람이 미하일 로마노프(1596~1643)로 그가 바로 미하일 1세다. 그는 [[러시아의 이반 4세|이반 뇌왕]](雷王:재위 1533~1598)의 첫째 왕후인 아나스타샤의 오빠인 니기타 로마노프의 손자로, 할아버지를 통하여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 [[표도르 1세]]와 친척 관계다.
 
== 생애와 통치 ==
밀사들이 [[모스크바]]에서 미하일과 [[보리스 고두노프]] 통치 때에 수녀가 되는 강요를 당한 어머니가 함께 살던 코스트로마(Kostroma) 근처의 [[수도원]]으로 와서 [[3월]]에 미하일은 마지 못하여 왕좌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20년 동안 아버지인 필라레트 로마노프와 공동통치를 했는데, 교육을 거의 제대로 어려운 16세의 나이로 [[7월 11일]]에 대관식을 올렸다.
[[파일:Tsar Mikhail I -cropped.JPG|섬네일|왼쪽|어린 시절의 미하일]]
미하일의 조부 니키타 로마노비치는 러시아의 초대 황후 아나스타시아의 오빠이자 [[이반 4세]]의 중앙 고문이었다. 어린이로서 미하일과 그의 모친은 [[1600년]] [[벨로제르스크|벨로제로]]로 추방되었다. 이 일은 [[1598년]] 초근에 선출된 [[보리스 고두노프]]가 잘못으로 그의 부친 표도르를 반역죄로 고발했던 결과였다. 미하일은 [[1613년]] [[2월 21일]] 젬스키 소보르에 의하여 러시아의 [[차르]]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나 평의회 대의원들은 [[3월 24일]]까지 [[코스트로마]] 근처에 있는 이파티에프 수도원에서 어린 차르와 그의 모친을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와 [[스웨덴]]의 왕권을 포함한 몇몇의 다른 선택권들이 제거된 후 선택되었다. 시초적으로 모친은 항의하여 자신의 아들이 너무 어리고 너무 어려운 사무직을 위하여, 그리고 그런 귀찮은 시간에 너무 부드러웠다는 것을 믿고 진술하였다.
 
미하일의 선거와 즉위는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가 자신의 [[오페라]] 《차르를 위한 인생》을 극화한 [[이반 수사닌]] 전설의 기초를 형성한다.
그는 최고 지도자가 되기엔 마음이 심약한 사람이었다고 하며, 실권은 늘 부모와 측근 고문들에게 있었다. 재위 기간 동안엔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 바사]]의 공격에 시달렸었다. [[1617년]]에 [[스웨덴]]과, 이듬해에는 [[폴란드]]와 각각 스톨보보 조약과 디빌리노 화평을 맺어 불안을 없앴다.
 
너무 황폐한 상태에서 미하일이 트로이츠카 수도원에서 몇주간 기다려야 했던 당시 수도는 [[모스크바]]에서 자신을 위하여 괜찮은 숙소가 마련되기 전에 75 마일 (121km) 떨어져 있었다. 그는 1613년 [[7월 22일]] 자신의 17세 생일에 왕위에 올랐다. 새로운 차르의 첫 작업은 그것을 점령한 국가들의 대지를 비우는 것이었다. 당시 스웨덴과 폴란드는 각각 스톨보보 화약 (1617년 2월 17일)과 데울리노 휴전 (1618년 12월 1일)과 함께 처리되었다. 데울리노 휴전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1633년]] [[10월]] 이후 자신의 사망까지 정부를 차지했던 차르의 부친의 망명으로부터 귀환이었다.
[[1619년]] [[정교회]] 총대주교인 아버지가 폴란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왔다. 그가 모스크바에 돌아오면서 [[교회]]의 주교와 미하일과의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그 때부터 [[1633년]]에 죽을 때까지 [[서유럽]]과 외교, 상업, 문화적 접촉을 늘이던 미하일의 정부를 지배했고, 모스크바의 재정적 궁지 해결, 중앙 정권의 권력을 늘이는 데 지방 정부 조직들의 개혁, [[농노제]]의 강화로서 전국회의의 광범한 활용을 실시했다.
 
미하일의 통치는 러시아 역사상 거대한 영토 확장을 보았다. 그의 통치 동안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은 지속되었으며 크게 [[카자크]]에 의하여 완료되고 스트로가노프가에 의하여 자금이 조달되었다.
아버지이 사망하자 미하일의 외가 친척들이 그의 정부에서 탁월한 역할을 맡았다. [[1645년]] [[7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알렉세이]]가 그의 뒤를 이었다.
 
차르 미하일운 자신의 일생의 말기를 향하여 걷지 못한 것에 결과를 가져온 그의 일생 초기에 [[말 (동물)|말]]타기의 결과로 진행성 다리 부상을 겪었다. 그는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s://www.youtube.com/watch?v=7P7mOPKiKz8&list=TLArItmNkHoCoI8Hl3mX5ol6O44AzY6n8L Romanovs: The first film. Michael I, Alexis I] – Historical reconstruction "The Romanovs". StarMedia. Babich-Design(Russia, 2013)
 
{{전임후임
줄 53 ⟶ 62:
|후임자=[[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러시아의 군주|차르}}
 
{{위키공용분류}}
{{전거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