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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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10-01}}
'''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중국 [[서진]] 말기에, 이민족에이민족이 의해서진의 일어난수도를 반란을정복한 가리키는난을 말이다말하는 것이다. [[회제]](懐帝)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때 일어났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서진 혜제|혜제]](恵帝)의 치세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 이후, 고대부터동북방에서는 [[중원]](中原)이라흉노 불리던 [[화베이]](華北)지역은이민족들이 혼란상태에한족들을 빠져,정복하려고 다수의호시탐탐 유민(流氓)이라야욕을 불리는 피난민이 각지를 유랑하고 있었고, 예전 [[한나라]]시대 이후 중원에 침입하여 한족과 함께 살고 있었던 북방 민족도, 활약의 기회를 엿보고드러내고 있었다.
 
[[산서성]]을 중심으로중심을 이주했던다스리고 흉노의있던 족장흉노왕 [[유연 (전조)|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 휘하에유연에게 공물을 주고 도움을 요청하여 사마영에게 군사 원조를 해주고 있었으나 [[304년]] 서진으로부터사마영을 독립을공격한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현재 산시성 리스현(山西省 離石縣)을 본거지로 삼고,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앉았다. 또한 한나라때당시 내려진한족들은 유씨유연을 성에한나라 의거해성씨인 유씨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은 흉노족 앞에서는 대선우 한족들 앞에서는 한왕(漢王)으로 칭해 한왕으로 칭했다불렸다. (이 나라는 후에 [[전조 (십육국)|조]](趙)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산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한족 유랑민의 우두머리였던 [[왕미]]를 휘하에 흡수해,함께 [[허베이성]]과 [[산둥성]]도 지배하에정복하였고 많은 한족들을 노예로 두게삼거나 되었다학살하였다.
 
팔왕의 난 후, 서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회제와의 관계에 잡음이 와 동해왕이 분사(憤死)하자 일거에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311년]] 갈족 석륵군에 의해 진나라군이서진 군이 대패하여 한족 장병 10여만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흉노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낙양]]에 대군을 보내 서진의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한나라의 수도 핑량(平陽;현재 중국 산시성 린펀현 山西省 臨汾縣)으로 연행했다. 회제의 부인과 어머니는 유총의 노비가 되었고 한나라 유씨와 사마씨들의 여성들을 모아 기생으로 만드는 등 한족에 대한 유린이 지속되었다.
 
회제의 사후 [[장안]]에서 [[서진 민제|민제]]가 옹립되었으나, 이미 실질적인 서진 왕조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제도 한나라의흉노족의 포로가 되었고, 민제의 일가 친척도 흉노족들의 노비로 나누어 지는 사태가 벌어진 이후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는 얼마 안 가 흉노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화베이는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민족들의 한족 유린이 본격적으로 획기적인시작된 사건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이었다.
 
{{서진 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