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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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 후, 서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회제와의 관계에 잡음이 와 동해왕이 분사(憤死)하자 일거에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311년]] 갈족 석륵군에 의해 서진 군이 대패하여 한족 장병 10여만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흉노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낙양]]에 대군을 보내 서진의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한나라의 수도 핑량(平陽;현재 중국 산시성 린펀현 山西省 臨汾縣)으로 연행했다. 회제의 부인과 어머니는 유총의 노비가 되었고 한나라 유씨와 사마씨들의 여성들을 모아 기생으로 만드는 등 한족에 대한 유린이 지속되었다.
 
회제의 사후 [[장안]]에서 [[서진 민제|민제]]가 옹립되었으나, 이미 실질적인 서진 왕조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제도 흉노족의 포로가 되었고, 민제의 일가 친척도 흉노족들의 노비로 나누어 지는 사태가 벌어진 이후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는 얼마 안 가 흉노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화베이는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민족들의이민족들이 한족한족들을 유린이유린하기 본격적으로 시작된시작한 것이 사건이 바로 영가의 난이었다난이다.
 
{{서진 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