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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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는 3차에 걸친 수십년의 남송 정벌을 진행하였고 남송의 거센 저항에 이기기 위해 가는 곳마다 학살하여 남송 많은 인구가 사라지게 하였고 수십개의 성을 공략할 때마다 포위하여 남송인들을 굶겨 죽였다.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고 [[남송 공종]]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멸망했다. 몽골군은 공종의 부인과 일족들을 기생으로 만들고 치욕을 주었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張世傑) 및 [[진의중]](陳宜中) 등 일부 남송의 유신들은 임안 함락과 동시에 공종의 서형 조하(趙昰, 1269.7.10.~1278.5.8.)를 황제(단종端宗)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취안저우시|천주]](泉州)의 실력자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포수경]](蒲壽庚)을 포섭하여 화남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서서히 강남에서 [[광둥성|광동]]으로 밀려난 옛 남송군은 병사한 단종의 후임으로 동생인 조병(趙昺, 1272.2.12.~1279.3.19)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남송 소제]]이다. 이후 선단으로 해상을 떠돌며 저항을 계속하여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崖山)이라는 아무것도 없던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한편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남송군과 대등한 전투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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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옛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공 대책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1279년]] 2월, 기나긴몽골인들은 소모전에사로잡힌 피로가한족들을 쌓인성 밖에 울부짖게 하거나 가는 곳마다 학살을 자행하여 옛 남송군은 패주했다사기가 떨어져 패배했다. 이것에 절망한 신하많은 남송 간부들이신하들은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뛰어들어 자살하였고, 그 와중에 육수부는 배안에서 어린 황제에게 경전인 [[대학]](大學)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3월 19일]] 저녁쯤 패배를 깨닫고, 소제를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뛰어들어 자살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원나라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 그 후 ==
[[송사]]에 의하면 일주일 뒤, 약 10만여 구의 시신이 해상으로 떠올랐다 한다.
육상에서 저항운동을 벌이던 [[문천상]]은 이 전투 이전인 [[1278년]]에 원나라의 포로가 되어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압송되었다. 원나라 왕조는 뛰어난문천상에게과 문인이던일족들에게 그를원나라에 등용하기충성을 위해요구했지만 설득을송나라 여러번신하로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남기를 거부하고원하며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1283년]]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국통일을중국 정복을 완수하였다.
 
이후 해당 전투에서 살아남은 [[남송]]의 유민 양왕(揚王) 진공(陳公)의 외손자이자 [[주세진|주오사]]의 아들 [[주원장]]이 다시금 원을 몰아내고 [[명나라|명]]을 건국하게 된다.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