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오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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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 [[946년]]~[[950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오대(五代)의 네번째네 번째 왕조로서, 건국자인 [[유지원 (후한)|유지원]](劉知遠)은 [[돌궐]] [[사타족]] 출신인 [[후진 (오대)|후진]](後晉)[[황제]] [[석경당]]의 부장이었다. 유씨란 성씨때문에성씨 때문에 국호를 한이라고 하였다. 수도는 카이펑이었다. 1세기 [[광무제]]에 의해 세워진 [[후한|한]](後漢; 동한(東漢))도 후한이라 불렀으나, 이를 구별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광무제의 한은 동한이라 부르고, 오대의 후한은 후한이라 부르면서 구별하기도 한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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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군이 유지원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요나라가 카이펑의 통치에 실패하여 거란인 병사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또한 요나라의 남진은 후진에 대한 징벌과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유지원의 군대와 싸울 의미가 없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유지원이 10개월만에10개월 만에 죽고, 차남 [[유승우]](劉承祐)가 황제가 되어 유지원의 시호를 고조 황제(高祖 皇帝)라 하고, 자신은 은황제(隱皇帝)가 되었다. 은제 때는 내분이 잇따라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웠다. 이에 노장 [[곽위]]([[후주]] 고조)가 모두 진압하였다.
 
젊은 은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중신들을 제거하였고,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치는것을 느낀 곽위는 분노하여 군사를 [[위주]]에서 일으켜 은황제를 공격했다. 곽위의 군이 카이펑에 육박하던 도중 [[950년]] 은제는 곽윤명(郭允明)에게 살해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