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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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은 가평천 계곡 북쪽 끝의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으며, 제27여단을 구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10km 진격했다.<ref name=ONeill134/>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이 예상되자, 사단장이었던 [[장도영]]은 오후 4시에 공세를 멈추고 2개의 선발 연대였던 제19보병연대와 제2보병연대에게 협력하여 방위 태세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한편 [[제7보병여단|제7보병연대]]는 선발 연대 바로 뒤쪽에서 예비 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Mossman382>Mossman 1990, p. 382.</ref><ref name=kimh630/> 방어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았던 대한민국 국군은 뉴질랜드군 야포와 미국 제213야전포병대대의 [[M101 105mm 곡사포]] 지원을 받고 있었다.<ref name=Horner69>Horner 2008, p. 69.</ref><ref name=Mossman402>Mossman 1990, p. 402.</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중지한지 1시간이 지나 방어시설을 구축했지만 대한민국 국군 선발부대는 일련의 고지 지역만 점령하고 계곡과 측면을 노출시켰다.<ref name=kimh630>Chae, Chung and Yang 2001, p. 630.</ref> 중국 제118사단과 제60사단이 오후 5시에 대한민국 국군을 공격했으며,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이 허술하게 구축한 방어 지점들을 여러 곳에서 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ref name=kimh630/> 모든 전선에서 압박을 받자, 대한민국 국군은 곧바로 거의 모든 지역을 내주고 돌파당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무기, 장비, 차량을 모두 버렸으며, 흩어진 채 산과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도주했다. 오후 11시에 장도영은 그의 모든 부대와 통신이 두절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ref name=Johnston91>Johnston 2003, p. 91.</ref> 다음 날 오전 4시, 뉴질랜드군은 손실을 막기 위해 철수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이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뉴질랜드군은 다음 날 아침 미들섹스 연대를 방어군으로 삼고 계곡 쪽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가 지자 대한민국 국군이 사실상 붕괴되었음이 명백해졌고, 뉴질랜드군은 다시 철수했다.<ref name=Horner69/><ref name=Johnston91/>
 
한편, 미국 제1해병사단은 동쪽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의 철수로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ref name=Johnston91/>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과 제40군은 제1해병사단의 반격 가능성으로 인해 제9집단군의 오른쪽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만 맡았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고, 미군은 비교적 덜 공격받게 되었다.<ref name=Johnston91/><ref name=Zhang149>Zhang 1995, p. 149.</ref> 그러나 미국 제1군단과 제9군단 구역의 유엔군 전방진지들은 중국인민지원군이 부대 사이에 틈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에 점차 방어하기 어려워졌고, 밴 플리트는 아침 중반에 캔자스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호지는 곧이어 미국 해병대에게 [[북한강]] 뒤쪽의 [[파로호|화천호]]와 대한민국 제6사단이 점령한 새 지점 사이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형성할 것을 명령했다. 호지의 계획은 대한민국 국군의 재편과 약간의 저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2,500명의 후위 부대가 조금 늦게 진지를 구축했지만 전혀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ref>Johnston 2003, pp. 91–92.</ref> 돌파를 우려한 호지는 4월 23일 대한민국 국군이 위치를 고수하지 못할 것에 대한 예방으로 제27여단에게 [[가평군|가평]]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했고, 제27여단에게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핵심 도로이자 중요한 보급로였던 17번 도로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로 이어지는 연결로 2개를 막는 임무를 주었다.<ref name=Horner69/><ref>Mossman 1990, p. 391.</ref>
 
제27여단은 아르길 연대가 전투 직전에 출항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3개 대대로 줄어들었다. 미들섹스 연대 역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비군이 된 상황이었다.<ref name=Horner68>Horner 2008, p. 68.</ref> 이와 같이 계곡의 폭 때문에 지속적인 선형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버크는 이용 가능한 2개 대대를 양쪽의 고지에 배치해야 했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강 동쪽의 504고지를 점령했으며,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제2대대는 서쪽의 677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북서쪽에 있는 약 800m의 수덕산은 필요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이 3개의 고지들은 강력한 자연방어진지를 형성했고, 주요 공세를 막는데 안성맞춤이었다.<ref name=AWM/>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단 진지는 측면 보호 없이 노출되는 등 여러 가지 결함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미들섹스 연대는 포를 가지고 북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중부 구역은 점령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여단은 포격 지원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이 2개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한다면, 선발 중대들은 지원이 없는 상황이 될 것이었고, 차단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용인해야 했다. 특히 계곡의 노출된 중앙 지역을 통해 4km나 되는 통신망을 가진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가 특히 공격에 노출될 수 있었다.<ref name=AWM/>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