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첸 전투 (163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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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스웨덴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레흐강 전투]]에서 황제군의 장군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패사시킨 후 빈을 압박했다. 개신교군의 공세에 두려움을 느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면직되었던 대(大)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재 기용하였다. 발렌슈타인은 약 3개월 만에 4만 명을 넘는 대량의 용병을 동원하여 패색이 짙던 황제군을 재정비하였다. 스웨덴군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군은 [[뉘른베르크]]로 진격하여 황제군과 결판을 지으러 했지만, 발렌슈타인은 진지를 구축하고 이를 맞아 싸웠기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졌다. 개신교 군은 여러번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격퇴당해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또한 병량부족에 빠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스웨덴의 참전이래 연전연승을 계속하던 개신교 군에게는 최초의 패배였기에 군사적 피해는 크진 않았지만 정치적인 타격은 심각했다. 눈치를 보던 독일제후가 황제군 지지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발렌슈타인은 이 승리를 기회로 삼아 작센으로 병사를 움직였다.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독일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두려워해 황제와 강화를 생각했다. 그 까닭에 작센을 공격한다면 조기에 강화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고,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유력한 세력을 이탈시킬 수 있을 거라고 발렌슈타인은 생각했다.
 
황제군의 작센 침공에 대해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구원을 위해 군대를 나움부르크까지 진격해 캠프를 쳤다. 라이프치히에 본영을 설치한 발렌슈타인은 여기서 동절기를 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군은 나움부르크에서 그대로 동계진지 건설에 들어갔다. 이것을 본 발렌슈타인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곧이어 파펜하임에게파펜하임을 보내 개신교측에 섰던 모리츠베르크를 공격하기 위해공격하도록 파견시켰다시켰다.
 
자신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라이프치히]]와 나움베르크를 지나는 도로의 연장선상에 있던 [[뤼첸]]으로 [[11월 14일]] 이동했다. 그러나 황제군의 병력분산을 알아챈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이 호기를 노려 결전을 강요하기 위해 은밀히 강행군하여 뤼첸으로 향했다. 얼마안가 개신교 군대의 접근을 알게된 발렌슈타인은 급히 파펜하임을 불러들이는 한편, 뤼첸에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구스타프군을 맞아 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