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노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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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노턴'''(Thomas Norton, 1532년 ~ 1584년 3월 10일)은 [[잉글랜드]]의 [[변호사]], [[정치인]], [[운문 작가]], [[극작가]]이다.
 
그는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고 1555년에 이너 템플 법학원에 입학했다. 영국 의회에서 서리(Surrey) 주의 가튼(Gatton) 지역 대표를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고, 대주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에 심취했는데, 특히 칼빈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1561년에 칼빈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Institution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을 고문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여 ‘고문 대장’(Rackmaster General)이란 악명을 얻기도 했다. 노턴이 가톨릭에 반감을 갖게 된 것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딸이자, 가톨릭 신봉자인 메리가 통치하던 1556년에 자신의 장인인 토머스 크랜머가 화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노턴은 법 관련 업무로 인해 1579년에는 로마에 체류한 바 있고, 이후에도 3∼4년은 채널 제도 관련으로 출국이 잦았다. 1570년에 런던시 최초로 왕실 수입 징수관에 해당하는 리멤브런서(remembrancer)라는 직을 맡았는데, 1584년 죽을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말년에는 종교적인 문제로 영국 성공회 주교들에게 반기를 드는 바람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런던탑에 감금되기도 했다. 이때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1584년 3월에 사망했다.
 
{{지만지|제목=고보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