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깨진 각주 수정
83번째 줄:
한편, 미국 제1해병사단은 동쪽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의 철수로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ref name=Johnston91/>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과 제40군은 제1해병사단의 반격 가능성으로 인해 제9집단군의 오른쪽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만 맡았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고, 미군은 비교적 덜 공격받게 되었다.<ref name=Johnston91/><ref name=Zhang149>Zhang 1995, p. 149.</ref> 그러나 미국 제1군단과 제9군단 구역의 유엔군 전방진지들은 중국인민지원군이 부대 사이에 틈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에 점차 방어하기 어려워졌고, 밴 플리트는 아침 중반에 캔자스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호지는 곧이어 미국 해병대에게 [[북한강]] 뒤쪽의 [[파로호|화천호]]와 대한민국 제6사단이 점령한 새 지점 사이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형성할 것을 명령했다. 호지의 계획은 대한민국 국군의 재편과 약간의 저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2,500명의 후위 부대가 조금 늦게 진지를 구축했지만 전혀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ref>Johnston 2003, pp. 91–92.</ref> 돌파를 우려한 호지는 4월 23일 대한민국 국군이 위치를 고수하지 못할 것에 대한 예방으로 제27여단에게 [[가평군|가평]]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했고, 제27여단에게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핵심 도로이자 중요한 보급로였던 17번 도로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로 이어지는 연결로 2개를 막는 임무를 주었다.<ref name=Horner69/><ref>Mossman 1990, p. 391.</ref>
 
제27여단은 아르길 연대가 전투 직전에 출항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3개 대대로 줄어들었다. 미들섹스 연대 역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비부대가 된 상황이었다.<ref name=Horner68>Horner 2008, p. 68.</ref> 또한 계곡의 폭 때문에 지속적인 선형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버크는 이용 가능한 2개 대대를 양쪽의 고지에 배치해야 했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강 동쪽의 504고지를 점령했으며,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제2대대는 서쪽의 677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북서쪽에 있는 약 800m의 수덕산은 필요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이 3개의 고지들은 강력한 자연방어진지를 형성했고, 주요 공세를 막는데 안성맞춤이었다.<ref name="AWM">{{웹 인용|title=The Battle of Kapyong, April 1951|publisher=The Australian War Memorial|url=http://www.awm.gov.au/encyclopedia/kapyong/doc.asp|access-date=23 January 2010}}</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단 진지는 측면 보호 없이 노출되는 등 여러 가지 결함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미들섹스 연대는 포를 가지고 북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중부 구역은 점령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여단은 포격 지원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이 2개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한다면, 선발 중대들은 지원이 없는 상황이 될 것이었고, 차단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용인해야 했다. 특히 계곡의 노출된 중앙 지역을 통해 4km나 되는 통신망을 가진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가 특히 공격에 노출될 수 있었다.<ref name=AWM/>
 
각 대대는 분리된 중대 규모의 방어진지에 산 정상과 산골짜기를 따라 배치되었고, 7km의 강력한 방어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방어해야 할 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각 중대는 넓게 퍼져 있었고, 상호 지원이 불가능했다. 대신 각 분대가 서로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각 중대는 사주 방어를 하기로 결정했다. 여단 본부는 4km 남쪽에 떨어진 계곡에 있었다.<ref>Horner 2008, pp. 69–70.</ref> 뉴질랜드 포병 부대가 여전히 대한민국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방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제9군단은 B중대의 미국 제213야전포병대대 105mm 곡사포 포대와 12개의 M2 4.2인치 박격포, 제2화학박격포대대를 제27여단에 배정했다. 미국 제72중전차대대 A중대에서 온 15대의 [[M4 셔먼]] 역시 지원 부대로 배정되었다.<ref name=Breen12/><ref name=Butler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