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시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다듬기 |
|||
1번째 줄:
{{전쟁 정보
|분쟁=
|전체=[[로마 공화정|로마]]의 전쟁
|날짜=[[기원전 91년]] - [[기원전 88년]]
|장소=[[이탈리아]]
|결과=[[로마 공화정|로마]]의 승리
|교전국1=[[로마 공화정|로마]]
|교전국2=로마의
|지휘관1=
|병력1=5만 명
|병력2=5만 명
}}
'''
==전쟁의 배경==
[[기원전 4세기]]와 [[기원전 3세기|3세기]] 동안 아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이탈리아]]의 주변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자발적인 동맹이냐 전쟁으로 인한 동맹이냐에 따라 차별적인 동맹규약을 맺고 있었다. 명목상으로 이들 도시는 독립적인 자치도시였으나 실제로는 [[로마 공화정]]에게 예속되어 상납금과 병력을 제공해야 했고 로마는 도시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상호간의 외교문제에 개입하며 이들을 억압했다.▼
▲[[기원전 4세기]]와 [[기원전 3세기|3세기]]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과 일련의 전쟁으로 지중해의 패권차지하는 과정에서 이들 도시들은 로마 군단의 절반 이상을 병력으로 제공하며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로마는 부와 권리를 이들 도시에게 나누어주길 거부했고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개혁가들이 [[로마 시민권]]을 이들 도시의 주민에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마다 [[원로원]]등 보수적인 기득권층은 강하게 반발했다.▼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과 일련의 전쟁으로 지중해의
==전쟁의 발발==
동맹시 전쟁은 그동안 이탈리아 동맹도시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특히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 당시 [[한니발]]의 회유에도 절대로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던 동맹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 국내정치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91년]] [[호민관]] [[
==전쟁의 진행과 결과==
[[기원전 90년]] 로마는 집정관 루푸스가 북부전선을 맡고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부전선을 맡기로 했다. 신생 이탈리아는 모든 면에서 로마와 같은 군사편제와 전술을 구사하여 로마를 괴롭혔다. 사실 로마가 치른 거의 모든 전쟁에 이들 동맹시들도 참전했으니 모든 면에서 로마와 같은 전쟁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쟁 초반 로마는 집정관 루푸스가 전사할 만큼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차츰 남부전선에서의 술라의 활약등에 힘입어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기원전 90년]] 말 휴전기에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권의 전면적 확대를 정한 법을 제출하고 민회는 이를 가결함으로써 동맹시 전쟁은 사그라지게 되었다. ▼
▲[[기원전 90년]] 로마는 집정관 루푸스가
이듬해와 그 다음해까지도 남부전선에는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로마 시민권의 확대로 명분을 잃게된 반란군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동맹부족과 도시들에게 로마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진정한 반도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듬해와 그 다음해까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