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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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사키오스 2세<br />Ισαάκιος Β' Άγγελος
| 그림 = Isaac II. Mutinensis gr. 122 f. 293v.jpg
| 작위 = [[
| 재위 = 1185년 - 1195년<br />1203년 - 1204년
| 배우자 = 마르가리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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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재위 ===
당시
1187년 10월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손에 떨어지자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189년]] 이사키오스는 독일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오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긴장상태에 들어갔으나 결국 [[1190년]] 2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의 십자군을 [[보스포루스 해협]]대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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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재위 ===
이사키오스는 8년동안 감금되어 절치부심 제위의 회복을 노렸다. [[1201년]] 이사키오스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알렉시우스]]는 서방으로 가서 아버지 이사키오스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다가 [[제4차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1203년]] 7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그해 [[8월 1일]] 이사키오스는 아들과 함께 공동황제로 복위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 사이의 알력과 십자군의 횡포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폭동이 일어났고 1204년 2월 8일 아들 알렉시우스 4세는 암살되고 그 며칠 뒤 이사키오스도 죽었다.
== 평가 ==
이사키오스는 초기에 시칠리아 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의 반란을 막는 데 앞장섰으나 별다른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그의 치세에 [[키프로스]], [[불가리아]], [[킬리키아]]가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또한 이사키오스는 조선업 전체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위탁해 버리는 결정으로 비진티움 해군의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왔다. 내정에서는 관직매매와 뇌물을 주고 방위를 맡기는 부패를 더욱 조장했으며 이 때문에 제국을 건실히 받쳐오던 [[테마 제도]]가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 가족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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