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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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천추궁이 1009년 1월에 불이 나자 고려 7대 국왕 목종이 이에 쓰러져 위독하였다. 또한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채충순]]을 불러 [[김치양]]이 모반을 꾀한다고 보고했고 목종은 곧 사직이 다른 성씨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위독하므로 [[고려 현종]]에게 양위할 것이라고 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외척 [[김치양]]이 [[천추태후]](千秋太后)와 더불어 정권을 농단하고,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음모하였다. 목종은 후사 없이 병을 얻어 중추원 부사(副使) [[채충순]](蔡忠順)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고 [[고려 현종|대량군 순]](詢)을 후계자로 삼아 사직을 타성(他姓)에 넘기지 않도록 부탁했다.
 
허나 고려사의 기록은 모순된 점이 많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목종이 폐위된 뒤 태후와 함께 궁 밖에 나가는 과정을 싣고 있는데 태후가 먹고자 하면 직접 그릇을 받들었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직접 고삐를 잡았다. 만약 [[고려 목종|목종]]이 위독했다면 위의 기록은 불가능하다. 또한 목종이 강조에게 폐위된 후 궁성을 쉽사리 나가려 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목종은 [[고려 현종]]에게 양위할 뜻이 없었고 왕위에 미련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실은 대량원군 세력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적은 기록에 감추어져 있다. [[헌애왕후|천추태후]] 시기 천추태후는 경주를 낙랑군으로 강등하고 자신의 고향 황주를 중심으로 한 패서 지역 인사들을 등용했다. 경주세력은 이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 또한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관계를 가진 후 아이를 낳았는데 [[고려 성종]] 시기 유학을 이끌었던 그들로선 천추태후의 행동을 유교적으로 어긋난 것이라 판단하였다.
 
하여 경주세력은 [[고려 현종|대량원군 왕순]]을 후계자로 내세우려 했다. 왕순 또한 일찍이 어렸을 때 왕위에 대한 욕심을 품은 시를 지은 것으로 봐 경주세력의 행동에 동참했다. 그리고 천추궁 방화를 기점으로 정변을 시도했다. 곧 고려 궁이 장악되고 사람을 파견해 왕순을 개경으로 모셔오도록 했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