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창 봉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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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움직임에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은 몇몇 지역에서 국민당 내부의 무력을 일부 접수하는 형태로 무장화를 진행시켰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는 꽤 많은 공산당 인사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요직에 붙어 있는 이도 많았다([[국공합작]] 참조).
 
이러한 내부 사정으로 당시 북벌군의 주둔하는 도시 중 난창이 비교적 허술하게 방비되고 있었고, 남창의[[난창]]의 공안을 주덕이[[주덕]]이 맡고 있어 조건은 갖추어지고 있었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를 기해 [[허룽 (사람)|허룽]](賀龍)과 [[저우언라이]] 등이 주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반란군은 여러 방면에서 무장병력으로 난창을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국민당군의 역습을 맞아 불과 5일 만에 도시를 내주고 [[징강 산]]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봉기가 벌어진 [[8월 1일]]은 국민당에 [[홍군|공산주의 군대]]가 최초로 맞서 싸운 날로 후에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로 삼아 기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