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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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 가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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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Kapyong South Korea 1952 (AWM HOBJ3147).jpg
|그림크기 = 320px
|설명 = 1952년 가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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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유엔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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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전역상자 중공군 춘계공세}}
'''가평 전투'''({{lang|en|Battle of Kapyong}},{{zh|s=加平战斗|p=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4월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7보병여단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여단의 측면으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677고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공세의 주요 목표로 변경했다. 하지만 격렬한 야간 전투 이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기적의 가평 전투'''({{lang|en|The miracle battle of Kapyong}},{{zh|s=奇迹之加平战斗|p=qíjì 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5월 26일부터 27일까지 미국 유타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240명의 장병들은 중공군 4000명의 공격을 막아내며 진지를 수호하였는데, 그 전투에서 적군 350명 전사, 830명 생포하면서 아군은 부상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는 기적의 전과를 이루어 내었다. 이는 세계 전사에 유례가 없는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승리의 전투이다. 미군이 수행한 이 가평 전투는 영 연합군의 4월의 가평전투와 구별하기 위해 "기적의 가평전투" 또는 "가평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 서울 재탈환 및 중공군 4차 공세 실패 ===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국군|국군]]이 [[서울특별시|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금강]] 선까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후 크게 주저앉은 상태였다. 아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그동안 국군이 낯선 전술을 구사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공군이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충분히 격파시킬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군|국군]]은 작전을 짜서 순조롭게 실시하여 3월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까지 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 열세는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다.
중공군이 곧바로 1951년 2월에 4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주공(主攻: 주력을 기울여서 적의 주력부대를 침)이 돌파를 시도하려한 지평리는 미군 2사단과 프랑스군의 고립방어로 완전히 차단당해 실패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이다. 결국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고 말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서울특별시|서울]] 다시 점령하기 위해 바로 5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파주]]로, 조공(助攻:세력을 도와 공격함, 또는 그런 공격)이 [[춘천]]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때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에는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5차 공세에 약 27만명과 북한군 약 3만5천명으로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를 격멸시켜 [[노동절]](May Day)에 맞추어 [[서울특별시|서울]]에 재입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다.
=== 중공군 5차 공세 시작 ===
1951년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국군 및 연합군의 전 전선에 강력한 포격을 실시한 후 5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포격이 멈추자 중공군 대군이 서부전선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각 9개 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19병단(兵團:국군의 야전군과 비슷함)은 [[개성]]-[[문산]] 축선에서 [[대한민국 1보병사단|국군 1사단]]과 [[제29보병여단|영국군 29여단]]을, 3병단은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군 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특별시|서울]]을 포위하려 하였다.
=== 국군 6사단의 후퇴 및 위기 ===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공산군 조공이 공격하기로 한 곳은 중부전선 [[춘천]]지역의 사창리였다. 이곳을 담당한 부대는 미군 9군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이었는데 중공군은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뒤를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였다. 중공군은 사창리를 돌파하여 중부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은 큰 피해를 받고, 4월 25일에 [[가평]]일대에 집결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은 부대원 반 정도만 남고 대부분의 중장비는 파손된 상태였다.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의 후퇴는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부대들의 후퇴로 이어져 전선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서부전선을 공격한 중공군의 주력이 [[글로스터 고지 전투]]에서 [[대한민국 1보병사단|국군 1사단]], 미군 3사단, 영국 29여단을 비롯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조공이었던 중공군 9병단이 전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버렸던 것이다. 만일 중공군이 이 구멍을 통해서 경춘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했다면 [[서울특별시|서울]]은 다시 공산군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성공되어 공산군의 승리로 될 위기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동원 된 부대가 바로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이다.
=== 영연방 27여단의 참전 ===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군이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다. 후퇴하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한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은 국군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중공군 20군과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27보병여단|영연방 제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오스트레일리아|호주]]군 대대와 [[캐나다]]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 등 3개 대대 병력으로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본진인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의 3대대는 [[가평군|가평]]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다.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군|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제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공헌하였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다.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제1차 춘계공세시에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국군|국군]]과 유엔군은 노네임선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되었다.
== 미군 213 야전포병대대, 기적의 가평 전투 ==
1951년 5월 말에 경기도 가평지역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감행되었던 무렵, 미국 유타주 시더 시티에 본부를 둔 그 지역 출신의 장병들 600명으로 구성된 미국 유타주 방위군 213 야전포병대대는 당시 가평에서 한국군과 미군24보병사단 21보병연대에 대한 화력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당시의 작전 지역은 가평군 북면 화악리 움터마을 뒤 공터(상홍적리)였다. 당시 포대가 지원하던 한국군은 아무런 통지 없이 후방으로 이동하였고, 공격 중이던 보병부대가 중공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전진 이동하자 보병의 엄호 없이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보병부대에 포위된 것을 알게 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 원수) 소속 4,000명의 중공군들은 5월 26일 밤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협곡인 몽골과 드렁골 양쪽을 통해 본부 및 본부포대와 A포대의 240명이 지키는 진지로 진격해 왔다.
보병 엄호 없이 고립된 240명의 장병들은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보급품에 의한 충분한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정찰대의 적의 움직임을 간파한대로 대대장 프랭크 댈리(Frank Dalley)와 A포대장 레이 콕스(Ray Cox) 대위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필사적이고 조직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포위 당한 상태에서 밤새 포격과 백병전을 용맹스럽게 수행한 결과 진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105mm 곡사포의 근거리와 원거리 사격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근접 전투를 위해서는 신관을 0.5초로 설정하여 쳐 들어 오는 적들의 머리 바로 위에 터지도록 하였다.
동이트자 전투가 수그러들었는데, 이 때 이이블 포대의 지휘관인 레이 콕스 대위는 18명의 병사와 박격포 한문, 기관총 세 정으로 수색대를 편성하여 중공군을 수색했다. 본부포대의 고든 판스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양쪽에 9명씩 협곡을 통해 바로 올라갔고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적군이 사살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잔당을 수색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작은 협곡 안으로 나오자 중공군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여기서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판스워스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랐는데, 중공군 병사들은 총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단 한발의 사격도 없었다. 그 옆의 작은 협곡에는 중공군 98명이 있었는데 판스워스와 다른 병사 한 명이 그들을 본부로 대리고 왔다.
=== 놀라운 전과 ===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전사 350명, 포로 830명의 엄청난 전과를 얻었는데, 놀랍게도 아군은 소수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 전사자는 한 명도 없는 기적을 이루었다. 5월 26일과 27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획득한 총기류들이 두 트럭 분량이었는데 이를 파괴시켰다. 부상자들을 보살피고, 중공군 포로들을 이동시키기 전에 전사자들을 정중히 매장했는데 일부 포로들이 이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완전한 일방적인 전과는 세계 전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적의 전과이다.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이날의 승전을 '기적의 전투'로 부르며 큰 자부심과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가진다.
이 놀라운 전과로 같은 해 12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한국 보훈처는 2011년 5월 26일 이 장병들의 출신지인 유타주 시드시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자유의 매달을 전달하였다.
당시 한 부대원이 쓴 글은 책임자였던 대대장 프랭크 댈리(Frank Dalley) 중령의 남다른 고뇌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훌륭한 리더였으며, 우리 모두를 염려해주었다. 몸무게 85kg에 갈색 머리였던 그는 일 년이 지나자 67kg에 백발이 되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대대의 부대원 600명의 책임자였고, 우리 600명 전원은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프랭크 댈리 대대장은 아침마다 텐트 밖에 흰 깃발을 꽂아두고 깃발이 있을 때는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기도했는데, "그 시간이 최고 사령관인 하나님께 여쭙고 명령을 받는 시간"이라고 했다. 한국전쟁 참전 미군의 19개 포병대대 중에 대원이 한명도 전사하지 않고 전쟁을 마치고 귀환한 대대는 이 213 야전포병대대가 유일하다. 이 기적의 전투는 성경에서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시24:8)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보호하신 사례와 같고(삿3:9, 3:15), 하나님께서 직접 적들에게 공포감을 주심으로(출 23;27, 신 7:20,23; 수 24:12), 적군들의 마음을 녹게 하고(수 2:11), 갈팡질팡하게 한(삿 4:15) 사례와 같다. 또한 몰몬경에서 힐라맨의 2000명의 용사들이 용맹스럽게 싸워 적을 물리치고 전사자가 한명도 없었던 사례(앨마 56:56)와 같다.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여러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전투를 치룬 213야전포병대대는 전쟁에 참여한 미국의 19개 포병대대 중에 한명의 전사자도 없는 유일한 부대이다.
=== 기적의 전투 기념 ===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참전 기념비가 59년 만인 2010년에 가로 1.4m, 세로 1.2m 크기로 새워졌다. 이 기념비는 당초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영연방참전비 입구에 세워졌다가 가평군 지원으로 2015년 11월에 북면 이곡리 카이저길 45-23으로 이전 설치되었고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회장 최승상)에서 관리하고 있다. 펼친 책 형태의 기념비에는 당시 전투상황이 한글과 영어로 새겨졌다. 이에 앞서 미국 유타 주 시다 시에는 2008년 9월 한국전 참전비가 세워졌다. 포대 진지가 있던 북면 화악리 움터마을 뒤 공터(상홍적리) 옆 도로변에도 이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전과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기적의 승리 요인 ===
213야전포병대대의 대대원들은 유타주 남부의 시더 시와 그 인근의 리치필드, 비버, 세인트 조지 출신이다. 이들은 당초 한국으로 파견된 독일의 부대를 대체하기 위해 독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들이 훈련한 결과 매우 정확하고 유능한 능력이 검증되어 한국 전쟁터로 배치되도록 변경되었다. 이들은 유타주 정착민들로서 미국 서부개척의 주역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일명 몰몬교) 교인들로서 18~23세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명예롭고 존경받는 농민, 교사, 상업인, 학부생, 석탄광산 노동자 등 직장인 들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돈독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기적의 승리는 그들의 전투력에 더하여 종교적 신앙의 영향에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조국의 부름을 받고 우방국의 자유를 위해 출병할 당시에 이 교회의 세인트 조지 성전장으로부터 "여러분이 성전 성약대로 의롭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생명을 잃지 않고 모두 무사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 성전장의 손자 중의 한명이 그 부대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적이 있는 대대 지휘관 Frank Dalley 중령은 신중한 계획과 많은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아침 그날의 활동을 계획하면서 혼자 시간을 내어 기도 했으며, 기도하는 시간에는 천막 밖에 흰색 깃발을 꽂았고, 깃발이 있을 때는 비상 상황이 아니면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그는 그 시간에 최고 사령관인 하나님으로부터 명령 받고 있다고 말했으며,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이라고 말했다.
213야전포병대대의 A포대 통신중대 기록병이었단 글렌 오그덴은 승인으로서 조직적인 훈련과 신앙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와 그들 간의 차이점을 본다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적은 조직이나 지시, 훈련도 없었다. 우리 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맡은 일에 아주 뛰어났다. 모든 것이 몇 번이고 연습한 것처럼 진행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주님이 그곳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240명이 4000명의 군대를 무찌르고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가평의 기적은 영원한 유산 ===
2008년 9월, 신 더블유 성 한국 부총영사가 시더시티에 위치한 로터리 100 주년 참전 용사 공원에서 열린 한국 전쟁 참전 기념비 헌납식에 참석했다.
신 부총영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전쟁은 때때로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고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2009년 9월 가평군과 시더 시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는 문화적, 경제적, 교육적 유대를 함께 나누자는 합의이다, 가평군 관계자는 “시더 시와 시민들은 가평에서 벌어진 ‘기적의 전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이 참전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두 지역 간 교류를 더욱 강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참전비 제막식은 2010년 10월 8일 오후 시더시에서 이진용 가평군수, 조 버지스 시다 시장, 참전 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2011년 가평의 기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정부는 관계자를 파견하여 이들 주 방위군과 다른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시더시티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를 방문했고, 뒤이어 남유타 주립대학 캠퍼스에서 2시간 동안 오찬을 함께 했다. 국가보훈처 박종왕 국장은 ""오늘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평화, 번영, 자유는 여러분 군인들의 사심없는 희생과 공헌 위에 새겨진 것입니다. 한국은 영원한 빚을 졌고 앞으로도 양국간의 신뢰와 우정을 계속 쌓아 갈 것입니다." 라며, '60년의 헌신과 60년의 우정'을 연설했다.
=== 결과 ===
4월의 가평전투에서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의 승리와 [[임진강]]에서 중공군으로 의해 패했지만 3일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로 중공군은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가평]]은 [[한국전쟁]] 역사의 길에 남는 거대한 전투의 장으로 변했고 이로써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5월의 가평전투에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213야전포병대대(몰몬 대대)는 자신들보다 17배나 많은 적군을 물리치고 엄청난 일방적 승리를 거두면서 아군의 인명피해는 한 명도 없었던 기적의 전과를 올렸다. 이는 성경에서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기사를 방불케 하는 기적으로서, 현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경이로운 전과이다. 이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더 이상 발생되지 않았고, 휴전을 추진하는 분위기로 지루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전황의 변화가 이어졌다.
== 이후 ==
[[캐나다]]에서는 가평 전투에서 승리하고 귀국하였을 때, [[위니펙]]에 위치한 부대 주둔지인 [[:en:CFB Winnipeg|CFB(Canadian Forces Base) Winnipeg]]을 'Kapyeong Barrack'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지 교민들은 통상 '가평부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2005년 캐나다군의 부대 통폐합 과정에서 [[:en:CFB Winnipeg|CFB Winnipeg]]에 주둔하던 육군병력들이 CFB Silo로 이동하고 위니펙 공항 인근의 제17비행단 주둔지가 새로운 CFB Winnipeg으로 명명됨에 따라 가평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가평부대'의 부지가 캐나다 연방정부와 원주민들간의 분쟁 대상이 되어 방치되어 있어서 여전히 현지 언론이나 주민들은 이 지역을 'Kapyeong'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CFB Silo내의 연병장 이름은 제2대대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Korea Parade Square'로 명명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평군|가평]]이란 단어를 희생과 영광이란 말로 기억되고 있다. 4월에 '가평의 날(Gapyeong Day)'로 지정하여 현역 군인들의 큰 기념일로 자리잡고 전투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3대대는 '가평3대대'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262&aid=0000004896 호주 육군 가평대대를 아시나요?]</ref> 가평전투 60주년인 2011년, [[가평군|가평]]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려 당시 영연방 참전용사들과 이례적으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줄리아 길라드]] 현직 총리가 참석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028432|제목=英연방 참전용사, 가평전투 60주년 기념행사|저자=우영식 기자|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3-04-24|확인날짜=2014-03-14}}</ref>
[[미국]] [[유타주]] 시더 시에서는 매년 5월 26일 가평 기적의 전투에 대하여 참전용사들과 시민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참전 용사들은 이제 90대의 고령으로 대부분 돌아가시고 몇 분 남지 않았다. 213야저포병대대는 남북전쟁 등 국내 전투와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이라크 파병 등에서 큰 공로를 세웠으며 현재는 222야전포병대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 같이 보기 ==
* [[
== 관련 작품 ==
=== 대한민국 ===
* 《[[KBS]]스페셜-6.25기획, 허시 형제 이야기, 61년만의 해후》 : [[2012년]]작 다큐멘터리
* 《[[JTBC]]특집다큐, 6.25의 이방인》 : [[2013년]]작 다큐멘터리
=== 해외 ===
* 《Gapyeong》 : [[2011년]]작 다큐멘터리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4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s://web.archive.org/web/20140130133418/http://korean-war.commemoration.gov.au/korean/china-intervenes-in-korean-war/third-battalion-at-kapyong.php 호주의 한국전쟁 참전]
* [https://www.youtube.com/watch?v=F_Q4NE2ryFI 유튜브-6.25 Korea War Ga-Pyung Battle(가평지구전투)]
* [https://web.archive.org/web/20140318210836/http://koreanwar60.tistory.com/340 세대공감625]
*[https://kafs.or.kr/file/?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zY7fQ%3D%3D&bmode=view&idx=3627921&t=board 한미우호협회 기적의 전투]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01008/31705857/1 동아일보 기적의 전투 기사]
*[http://www.narasarang.kr/news/articleView.html?idxno=731 나라사랑 기적의 전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73212#home 중앙일보 미군 600명이 중공군 4000명 물리친 기적의 가평 전투]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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