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비외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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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벨기에 바이올린 명수이며 작곡자로 통하는 비외탕은 [[1820년]] [[2월 17일]] 벨기에의 베르비에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아노 조율사이자 악기 제조사로 일하는
1829년 베리오와 함께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로 가 로드 협주곡을 연주하여 성공적으로 데뷔하지만, 이듬해 [[7월 혁명]]이 터지고 스승인 베리오가 정부인 마리아 말리브란과 결혼하고 연주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브뤼셀로 돌아오게 된다. 비외탕은 말리브란의 누이와 함께 음악 실력을 갈고 닦는다.
1833년에는 독일로 여행을 떠나 [[루이스 슈포어]]와 [[로베르트 슈만]]과 친교를 쌓는데, 슈만으로부터 '작은 [[파가니니]]'라는 별명도 얻는다. 이후 10년간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엑토르 베를리오즈]] 및 [[니콜로 파가니니]]를 비롯한 여러 청중들 앞에서 공연한다.
한편 작곡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서, 빈의 지몬 제히터에게서 수업을 듣고 1835년-1836년의 겨울에 파리의 앙투안 라이하에게 작곡을 배운다. 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쓰여졌는데, 바로 이 때 쓰여진 것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은 184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연과 이듬해 파리 초연에서 극찬을 받았는데, 베를리오즈는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격조 높은 교향곡"으로 평가하였다.
비외탕은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피아니스트 [[지기스문트 탈베르크]]를 반주가로 동행하여 미국에서도 연주회를 가진다. 특히 [[러시아 제국]]의 초청을 받아 1846년부터 1851년까지 [[니콜라이 1세]]의 궁정음악가 및 제국극장 수석연주가로 임명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바이올린 교육과정을 세워 향후 '러시아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초석이 된다. 1871년에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돌아와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외젠 이자이]]가 이 때 비외탕을 사사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오른팔을 못 쓰게 되자,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에게 교편을 맡기고 1873년에 파리로 돌아간다. 비외탕은 차츰 뇌졸중의 후유증으로부터 회복되었으나, 1879년에는 발작이 재발하여 결국 바이올린을 다시 잡지 못한다. 말년에는 딸 부부가 살고 있던 [[프랑스령 알제리|알제리]]의 무스타파 수페리에로 간다.
비외탕의 일곱 협주곡과 짧은 실내악 몇 곡을 비롯해 많은 곡들이 이 때 쓰여졌다. 더 이상 바이올린을 연주할 순 없었지만 그 대신 다른 악기에도 관심을 가져 두 개의 첼로 협주곡, 몇 개의 사중주곡도 작곡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펠릭스 멘델스존]]의 곡들을 동경하며 보다 고전기의 작품들에 더 관심을 갖고 가벼운 곡들을 몇 곡 쓴다.<ref>{{cite thesis|last=Leong|first=Aloysius T|date=January 2000|title=The first five violin concertos of Henri Vieuxtemps: Style, structure, influence, and performance practice|url=http://opencommons.uconn.edu/dissertations/AAI9964786|access-date=26 November 2017}}</ref>
[[1881년]] [[6월 6일]],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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