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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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대는 [[1세기]] - [[9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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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삼국시대}}
[[파일:Ddol-mangB.jpg|thumb|220px|황금으로 만든 삼국시대 왕의 허리띠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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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발해}}
[[파일:Pressapochista4.jpg|thumb|190px|발해의 석판]]
발해(渤海)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696년]] [[차오양|영주]](榮州)에서 [[거란]](契丹)족의 반란이 일어나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졌다. 옛 고구려의 장수인 [[대중상]](大仲象 혹은 乞乞仲象)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은 이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이끄는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죽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의 지도자가 된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지린 성]] [[돈화시]]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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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신라를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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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고려}}
[[파일:Korea-Goryeo celadon-Incense burner-01.jpg|thumb|200px|고려의 청자칠보투각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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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
{{본문|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이런 왕건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고,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926년]]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통일을 이루었다.
==== 광종의 개혁 정치 ====
태조의 뒤를 이은 [[고려 혜종|혜종]]과 [[고려 정종 (3대)|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이런 상황에서 [[고려 광종|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956년]])과 [[과거 제도]]([[958년]])를 시행하였다. 두 제도를 통해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으며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과거제도의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 설정의 기초 작업이었다. 또한 관리의 복색을 제정함으로써 귀족층을 안정시키고 위계 질서를 확립하게 된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했으며,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
광종의 개혁은 [[고려 경종|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고려 성종|성종]] 때의 지배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75쪽. </ref>
====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
[[고려 성종|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해온 문벌 귀족들이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이들은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10세기 말에는 [[고려 목종|목종]](穆宗)이
결국 1010년에
1018년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고려에서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를 향상시켜 나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국방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했고,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4쪽. </ref>[[강감찬]](姜邯贊)의 [[귀주 대첩]]이 있다. 그 뒤 고려와 거란은 화평을 되찾아 비교적 평온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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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북방민족인 여진족(女眞族)과의 관계도 묘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본문|고려-거란 전쟁}}
▲그리고 다른 북방민족인 [[여진족]](女眞族)과의 관계도 묘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국방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했고,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4쪽. </ref>
====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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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정권의 성립 ====
{{참고|무신정권}}
12세기 들어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평소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임금인 [[고려 명종|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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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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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
[[조선]]
=== 역사 ===
==== 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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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ejo of Korea.jpg|thumb|left|200px|[[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의 영정.]]
[[1392년]] 이성계의 5남인 [[조선 태종|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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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파일:Statue_Sejong_le_Grand.jpg|thumb|left|[[세종대왕]] 동상]]
[[조선 태종|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숙청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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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되었다.
=== 역사 ===▼
==== 후기 ====
===== 붕당 정치의 변질 =====
{{본문|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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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후로 본다.▼
=====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서울]]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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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후로 본다.
=== 대한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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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한반도와 인근의 도서와 해역을 통치하였던 [[제국]]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본 제국|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
=== 일제강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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