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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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Lucius Verginius Rufus, 서기 15년{{spnd}}97년)는 1세기 후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를 관리한 [[고대 로마]]의 총독, 군장교이다. 그는 세 차례 [[집정관]]에 오르기도 했다 (63년, 69년, 97년). 그는 [[대플리니우스]]와 [[소플리니우스]]의 출생지인 [[코뭄]] 근처에서 태어났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기사 계급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로]] 황제 시절인 63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직을 마친 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임명됐다. [[빈덱스|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76년에 네로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는 그에 맞서 군대를 지휘했고 68년에 오늘날 [[베아송브장송]] 인근에서 [[베손티오 전투 (68년)|반군]]을 패배시켜냈다. 네로의 실각 이후,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휘하의 군단들은 [[갈바|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빈덱스의 동맹)보다 앞서 그를 황제로 지지했으나,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는 황제 자리를 거부하였다. 69년 4월에 [[오토 (로마 제국)|오토]]가 죽은 뒤, 병사들은 베르기니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다시 권했으나, 그는 다시 한번 거절했다. 베르기니우스는 로마에서 북서쪽에 있는 [[에트루리아]]의 해안 도시 [[알시움]]의 저택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그는 수학을 하고, 시를 지으며, [[살롱 (사교계)|사교 모임]]을 조직하고 참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살해된 뒤, [[네르바|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원로원로부터 황제로 선출됐다. 네르바는 97년에 자신과 공동 집정관으로 은퇴를 권유받았던 연로한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를 택했다. 하지만 베르기니우스가 연설을 할 예정이었을 때, 그는 가지고 있던 책을 쓰는 걸 떨어트렸고, 이것을 주우려 할 때 미끄러져 엉덩이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얼마 안 되어 8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국장이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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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tl|title=[[로마 제국]]의 [[집정관|보좌 집정관]]|years=63년|regent1=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s-aft|after=[[티투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63년 집정관)|티투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br/>[[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as=보좌 집정관}}
{{s-bef|before=[[오토 (로마 제국)|마르쿠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br/>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II2선}}
{{s-ttl|title=[[로마 제국]]의 [[집정관|보좌 집정관]]|years=69년|regent1=[[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69년 집정관)|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s-aft|after=[[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리우스 사비누스]], <br/>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69년 집정관)|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