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태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봇: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틀 부착 (근거 1, 근거 2)
편집 요약 없음
28번째 줄:
 
지소태후가 섭정하던 시기는 대체로 진흥왕 12년([[551년]])까지로 여겨진다. 551년에 진흥왕이 연호를 고쳤는데,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하게 되면서 연호를 고쳤을 것이라고 본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1865&v=42 한국민족문화대백과]{{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1865&v=42 }}</ref> 지소태후는 [[이사부]], [[거칠부]] 등의 보좌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545년]]에는 이사부의 건의를 따라 거칠부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흥륜사]]를 완공하고 불사리를 받아들이는 등 [[불교]]의 중흥에도 힘썼다. 한편 당시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 하에서 [[고구려]]와 몇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진흥왕 11년(550년)까지의 전과는 지소태후의 섭정 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섭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574년]]에 [[불국사]]를 중건 하였다는중건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574년 이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학계에서 [[위서 (문헌학)|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소태후는 [[원화 (역사)|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화랑]]을 조직했다고 한다. 지소태후는 자신의 딸인 [[숙명공주 (신라)|숙명]]과 [[보명궁주|보명]] 등으로 하여금 [[진흥왕]]을 받들도록 하였고, [[만호부인|만호]]로 하여금 손자인 동륜의 비가 되게 하였다. 또한 진흥왕의 왕후이자 대원신통(大元神統)이었던 [[사도왕후]]를 싫어하여, 그녀를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사도왕후가 이를 알고 진흥왕에게 고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사도왕후에게 사실을 알려준 것은 지소태후의 아들인 [[노리부]](세종 : 세종은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지소태후의 아들이다.)의 부인이었던 [[미실]]이었는데, 세종이 미실에게 반하여 결혼하고자 했을 때, 지소태후는 미실이 [[박영실]](英失)의 자손(미실의 어머니 [[묘도부인]]과 [[사도왕후]]는 박영실과 옥진궁주 사이의 딸이다.)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려 하였으나, [[이사부]]와 상의하여 결국 혼인을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