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빅투아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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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투아르는 [[1748년]]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 레슈친스카]]와 그녀의 형제 [[도팽 루이 페르디낭|루이 페르디낭]], 그녀의 자매들과 가깝게 지녔고 그들과 그녀의 아버지 [[프랑스의 루이 15세|루이 15세]]의 외도를 슬퍼하였다.
 
빅투아르는 그녀의 형제 자매들과 같이 여러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지만 왕궁 무도회는 좋아하지않았다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당시 유행했던 정원과 외국 식물을 좋아하였다. 그녀의 언니 [[프랑스의 엘리사베타]]는 [[1739년]] [[파르마의 필리포]](Philippe Ier de Parme)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753년]] 엘리자베타는 필리포의 이복형제 스페인의 왕 [[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페르난도 6세]](Ferdinand VI d'Espagne)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당시 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비 [[포르투갈의 바르바라]]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또 얼마 후 페르난도6세 또한 죽어서 이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동안, 친애왕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의 자식은 빅투아르와 [[프랑스 공주 마리 아델라이드|아델라이드]](Adélaïde de France)공주만 생존해 있었다. 두 공주는 반기독교적 혁명에 반명에 반대하였고 [[1791년]] 2월 모욕들을 겪으며 [[프랑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