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지 에케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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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3년([[1585년]]) 음력 1월,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에 정식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이를 수락하고,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시코쿠]] 평정 후, [[이요노쿠니|이요 국]]내 2만 3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덴쇼 14년([[1586년]]) [[규슈]] 평정 후, 6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승려이면서 다이묘의 신분에 오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어 전국에서 행해진 검지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구보다도 임진왜란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으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부대에 속해 [[웅치 전투]], [[정암진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 임진왜란에서 그는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주력했고 자신이나 다른 장수들이 약탈한 문화재의 감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게이초 4년([[1599년]]) 교토의 겐닌지를 재흥하는 데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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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코쿠의 조소카베 가문의 외교승 히유와 함께 잇쓰보즈(一対坊主)<ref>잇쓰란 한쌍으로 묶어 설명할 때 쓰는 말이며, 보즈란 승려 중에 우두머리 즉 주지승을 가리키는 말이다.</ref>라고 불리었다.
* [[웅치 전투]]후,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성에 탄복하여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표목을 세웠다고 한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36303 두산백과_웅치전적지]</ref> 이 표목을 세운 인물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전투의 지휘는 안코쿠지 에케이가 하였다.
* 임진왜란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찬성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임진왜란에 출진한 왜장들 중 가장 탐욕이 심했다.
*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의 수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여 감정을 하기도 했고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들을 납치하며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탐욕의 소유자였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