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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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2월 24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 IMF 외환위기위기 사태극복 ====
 
김대중 정부는 아직 출범하기도 전에 [[김영삼]] 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받았고, 김대중 정부는 국제 수준의 기업 투명성 강화와 부채비율 축소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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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비 활성화와 내수진작 정책을 펼쳤지만, 신용카드 산업의 무분별한 확장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해 그 후에 일가족 자살 사건 등으로 상징되는 카드대란 사태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2001년에 IMF에게 빌린 195억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4년여에 걸친 외환위기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 전쟁|6.25 전쟁]] 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촌평답게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인해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 정권의주요 특징정책 ===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1998년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10년간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명의 사형수도 형 집행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기조는 정권이 교체된 [[이명박]] 정부 들어 사형 집행으로 다시 복귀하고 있다.<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2552385 법무부, 사형집행쪽으로 '가닥'…시기놓고 '고민'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 </ref>
 
대북외교 정책중 [[햇볕정책]]으로 명명된시작된 대북 포용정책도 김대중 정권의 중요한주요 특징중정책중 하나이다. 국민의 정부 이전에는 북한과의 대결관계는 국면이형식적이고 확고하였고교류가 이루어지지않은 상태로 군사적 대치관계에 놓여있었으나, '멸공통일선평화 후통일'을 통일의 기본 정책으로기본원칙을 삼았지만계승해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 노선이교류를 변경되어기반으로 한 화해, 협력 등을 강조한 포용정책으로 전환되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과 [[개성공단]] 설립 등의 가시적 성과는 있었지만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사건인 [[대북 불법 송금사건]]은 후일 [[햇볕정책]]의 진정성을진정성과 의심받는투명성의 문제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북한이 정상회담 이후 미사일과 핵 실험을 시도할 수 있게 된 이유가 이때의 불법 송금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사실상 [[클린턴]]행정부의 외교적 요구도 있기도 하다.
 
=== 퇴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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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37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김대중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탁월한 카리스마와 폭넓고 풍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토론능력과 대중웅변술, 독재정권하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으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조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극한의 양자대결과분단이 적대적고착화되고 의존관계에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부정적 평가===
 
먼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으나,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기 출마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과 1992년의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기고 1995년에 정계에 복귀한 것에 대해 비판이 있다.

또한 신민당 국회의원 시절 20대 여성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지고도 훗날 대통령으로써 [[국가정보원]]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생활을 은폐하려하였다는 사실이 불거져 도덕성에 있어서도 많은 논란이 상존하고의혹이 있다. 이 의혹에는 2000년 6월 내연관계로 알려졌던 김모 여성이 자살로 사망하였다사망하였다고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의 색깔론 공세로 인해 이를 의식하여 구 군사정권 잔재의 청산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과의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 뒤 [[경북]] [[구미시]] 유세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김종필씨와 손을 잡고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겠다"라는 공약을 내세웠고, 대통령 취임 이 후에는 [[김중권]], [[이상주]] 등의 [[제5공화국]] 핵심인사들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중용함과 함께 김영삼 대통령의 [[전두환]]과 [[노태우]] 사면을 찬성해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역사청산에 소홀했다"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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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ref name="비리"/> 집권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역주의정치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는 새천년민주당의 기반이었던 [[전라도]] 지역에선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와 반대로 한나라당의 정치기반인 [[경상도]] 지역에서는 강한 반감을 받고 있는 것 또는 동서간 지역감정에 기인한 지역적 편차로 지적된다. 그러나 호남지역에서만 3,698,946표의 유효표 중 약 87%인 3,217,611표를 득표하는 등 득표율을 놓고 비판도 존재한다.<ref>[http://www.nec.go.kr/sinfo/index.html 역대 선거정보 시스템]</ref> 지역주의는 원래 독재정권의 정치적선전이었으나, 현재는 [[3당합당]]에 두고 이익과 반사이익이 있다.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과 함께 이른바 ‘파벌정치’를 내세워 수시로 [[정당]]을 해체, 결성하여 한국 정치문화를 퇴색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으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3당합당]]에 대해 견제하였으나, 박정희측근인 [[김종필]]과 단일화하는등 독재세력청산에 소홀하였고 이렇듯 커다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의 극복 과제로 남게 되었다. 또한 그가 퇴임 이후에도 정치현안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호남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훈수정치’와 ‘지역주의의 화신’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향인 [[호남]] 지역에서도 ‘노욕’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2 />
 
[[2008년]], 그가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목포를 방문하여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자 참여자치21과 광주 경실련, 목포YMCA 등 [[광주]]·[[전남]]지역 7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DJ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목포를 방문하고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YS가 부산에 가서 한나라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라며 "이런 구도를 은근히 부추기면서 훈수정치를 하려는 DJ의 노욕에 대해서 시민사회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력히 비판했으며 <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6358 "YS와 다를 바 없다"... 광주·전남 시민단체, DJ에 '직격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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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과 2002년 2번에 걸쳐 일어난 연평해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도 비판이 되고 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도중에 일어난 [[제2연평해전]]은 아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이 침몰하는 참사를 낳았음에도, 이들의 영결식에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해군 합참의장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국가차원에서 첫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 사생아 논란의혹 ====
[[1970년]], 당시 40대의 김대중은 20대의 요정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랫동안 근거없는 소문으로 치부되었으나 [[2005년]], [[SBS]]에서 김대중의 숨겨진 딸을 취재 · 보도하여 그의 사생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으며 그가 자신의 사생활 은폐를 위해 [[국가정보원]]까지 동원하였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어 곤욕을 치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