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선진리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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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고려 시대]] 초기 남도수군의 조창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어 이 지역은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으며 조창을 방어하기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통조포로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태종 (조선)|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ref name="h">[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url=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 사천선진리성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가쓰노부|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 (건축)|왜성]]을 쌓았고, [[시마즈 요시히로|요시히로]], [[시마즈 다다쓰네|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 사천선진리성 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틈을 노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ref>[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url=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 조명군총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