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1.222.185.119(토론)의 33749651판 편집을 되돌림
태그: 편집 취소 m 모바일 웹 고급 모바일 편집 동음이의 링크
1번째 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왕 정보
|이름 = 신문왕
|원래 이름 = 神文王
|그림 = 파일:Royal Tombs of Sinmun of Silla.jpg
|설명 = [[경주 신문왕릉|신문왕릉]]
|본명 = 김정명(金政明)
|시호 = 신문(神文)
|작위2 = 신라국 왕태자
|재위2 = 665년 8월 ~ 681년 7월 1일 {{font color|gray|(음력)}}
|전임자2 = [[문무왕|태자 법민]] (문무왕)
|후임자2 = [[효소왕|태자 이홍]] (효소왕)
|작위 = [[신라의 국왕|제31대 신라 국왕]]
|재위 = 681년 7월 7일 ~ 692년 7월 2일 {{font color|gray|(음력)}}
| 종교 = [[불교]]
|전임자= [[문무왕]]
|후임자 = [[효소왕]]
|부친 = [[문무왕]]
|모친 = [[자의왕후]] 김씨
|왕후 = [[폐비 김씨]], [[신목왕후]] 김씨
}}
 
'''신문왕'''(神文王, ? ~ [[692년]], 재위: [[681년]]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군주|왕]]이다.
문무왕과 자의왕후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장남 [[효소왕]]이 6세의 나이에 즉위한 점을 고려하면 사망 당시 [[장수 (수명)|장수]]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665년]] 8월 동복 형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8월,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이 [[김흠돌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정희]](政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그의 딸 역시 폐위되었다.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683년 일길찬 [[김흠운]]의 딸([[신목왕후|신목왕후 김씨]])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김 (성씨)|김]](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8/신문왕|본기 권8 신문왕]] |인용문= 神文王 立 諱政明 明之字日怊}}</ref> [[문무왕]](文武王)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이다.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되었고, 681년 7월 7일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하면서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의 통치 기반을 굳히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하여 예부에 소속시키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 생애 ==
문무왕과 자의왕후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장남 [[효소왕]]이 6세의 나이에 즉위한 점을 고려하면 사망 당시 [[장수 (수명)|장수]]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ref>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607/113813195/1</ref> [[665년]] 8월 동복 형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8월,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이 [[김흠돌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정희]](政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그의 딸 역시 폐위되었다.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683년 일길찬 [[김흠운]]의 딸([[신목왕후|신목왕후 김씨]])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8/신문왕|본기 권8 신문왕]] |인용문= 二年...六月 立國學}}</ref> 하여 예부에 소속시키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683년]] 10월, [[고구려 부흥운동|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보덕국]]의 [[안승]]에게 소판의 관직의 등급과 함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684년]] 11월, 보덕국이 지배하는 [[익산시|금마저]]에서 안승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였고 보덕국을 멸하였다.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신라의 행정 구역|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시|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ref>{{서적 인용|제목=[[삼국사기]]|성=[[김부식]]|연도=1145|장=[[:s:삼국사기/권08/신문왕|본기 권8 신문왕]]|인용문="王欲移都達句伐 未果"}}</ref>
 
[[687년]] 5월, [[수조권]] 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689년]] 1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
 
[[692년]] [[8월 19일]]([[음력 7월 2일]])에 붕어하였고 능은 낭산 동쪽에 마련되었다.
 
== 가계 ==
* 조부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2~661)
* 조모 : [[문명왕후]](文明王后)
* 부왕 : [[문무왕]](文武王, 626<ref>문무대왕비</ref> ~681, 재위:661~681)
* 모후 :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 ~681년)
** 형 : [[소명태자]](昭明太子, ? ~665)
** 왕비 : [[폐비 김씨]](廢妃 金氏) -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 681년 폐위되었다.
** 왕비 : [[신목왕후|신목왕후 김씨]](神穆王后 金氏, ? ~ 700년 6월 1일) - 일길찬 [[김흠운]](金欽運)과 [[요석공주]]의 딸.
*** 아들 : [[효소왕]](孝昭王, 687~702, 재위:692~702) - 신라의 제 32대 왕.
*** 아들 : [[성덕왕]](聖德王, 691~737, 재위: 702~737) - 신라의 제 33대 왕.
*** 아들 : [[김근질]](金根質)
*** 아들 : [[김사종]](金詞宗)
 
== 신문왕이 등장한 작품 ==
* 《[[대왕의 꿈]]》 ([[KBS 1TV|KBS]], [[2012년]]~[[2013년]], 배우: [[조용진]])
 
== 기타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09-26}}
[[진골]]왕통의 세 번째 왕이었으나 그는 모계로는 실제 [[성골]]에 해당된다. 그는 부계로는 [[진흥왕]]-[[진지왕]]-[[문흥왕]](추존)-[[무열왕]]-[[문무왕]]으로 이어졌으며, 어머니 [[자의왕후]] 김씨는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구륜의 아들 김선품의 장녀(長女)이다. [[문무왕]]과 자의왕후는 7촌 고모-조카간이 된다.
 
== 각주 ==
<references/>
 
{{전임후임
|전임자 = [[문무왕]]
|후임자 = [[효소왕]]
|대수 = 31
|직책 = [[신라]] [[신라의 역대 국왕|국왕]]
|임기 = [[681년]] - [[692년]]
|앞이름 = 전 대
|뒤이름 = 후 대
}}
{{신라의 섭정}}
{{신라의 왕}}
{{신라의 왕릉}}
 
[[분류:신문왕]]
[[분류:신라의 군주]]
[[분류:한국의 섭정]]
[[분류:생년 미상]]
[[분류:경주 김씨]]
[[분류:692년 사망]]
[[분류:불교 군주]]
[[분류:문무왕]]
[[분류:7세기 한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