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타 마사요시 (181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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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 [[1810년]] - [[1864년]])는 [[에도 시대]] 말의 다이묘로 [[사쿠라 번]]의 5대 번주이다.
 
== 일생 ==
=== 유년 시기 ===
[[분카]] 7년([[1810년]]) [[8월 1일]], 제3대 번주 홋타 마사토키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이 때의 이름은 마사히로(正篤)였다. [[분카]] 8년([[181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백부의 아들인 홋타 마사치카가 번주 자리를 계승하고 2세의 마사히로가 그의 양자가 되었다.
 
=== 번주 및 로주 취임 ===
[[분세이]] 8년([[1825년]]), 마사치카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자 번주로 취임하였다. [[덴포]] 8년 ([[1837년]])부터 [[덴포]] 14년(1843년)까지 [[로주]]로 있었다.
마사히로는 [[난학]]에 관심이 많아 '란벽'으로 불렸으며, 외국과의 통상을 주장하는 개국파였다. 그 후,[[안세이]] 2년([[1855년]]) [[아베 마사히로]]의 추천을 받아 다시 [[로주]]가 되고 [[로주]] 상석 및 외국괘 [[로주]]를 겸하게 된다. [[안세이]] 3년에는 자신의 이름자 중 [[쇼군|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이 된 [[덴쇼인|아쓰코]](篤子)와 겹치는 글자를 고쳐 마사요시로 개명했다. [[안세이]] 5년([[1858년]]), 미국총영사인 타운젠트 해리스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조인을 요구해 오자, 조약체결을 승인하는 [[고메이 천황]]의 칙허를 받기 위해 교토로 갔지만, 존황양이파와 연대하고 있던 천황은 이를 거부하였다.
 
=== 쇼군 후계자 다툼 ===
한편,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병으로 쓰러지자 그 후계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이에모치|도쿠가와 요시토미]](기이번주) 지지파인 난키파와 [[도쿠가와 요시노부]] (히토쓰바시 당주) 지지파인 히토쓰바시파가 대립하게 된다.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외교문제로 대립하던 터라 그 아들인 요시노부에게도 호감을 가지지 못하고, 내심 요시토미가 14대 쇼군에 적당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토에서 조정의 강경한 반대로 칙허를 얻지 못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를 다이로로 추대한다면 히토쓰바시파에 기울어진 조정 대신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어 히토쓰바시파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러나 마사요시가 상경하던 중 [[로주]] [[마쓰다이라 다다카타]] , [[기슈 번]] 가로 [[미즈노 다다나카]]의 공작으로 난키파인 [[이이 나오스케]]기 [[다이로]]로 취임하고 히토쓰바시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마사요시도 [[로주]]직에서 파면당하자 [[안세이]] 6년([[1859년]]), 4남인 홋타 마사토모에게 번주 자리를 양보하고 은거하였다. 사실 이이 나오스케는 마사요시를 재등용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안세이 대옥]]으로 히토쓰바시파 다이묘들이 엄중한 처분을 받는 중이어서 이를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홋타와 이이 나오스케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억측을 불러, 사쿠라다문외의 변이 일어난 후인 [[분큐]] 2년(1862년) 근신 처분을 받아 [[사쿠라 성]]에서의 칩거를 강요받게 된다.
 
[[겐지 (1864년)|겐지]] 1년([[1864년]]) [[3월 21일]]에 사망. 향년 5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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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810년 태어남]]
[[분류: 1864년 죽음]]
[[분류: 에도 시대의시대 인물사람]]
 
[[de:Hotta Masayos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