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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llang|mn|Монголчууд}}, {{llang|ru|Монголы}}, {{llang|en|Mongol people}})은 [[몽골]]에 거주하는 [[몽골계 민족]]이다. [[러시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주로 [[내몽골 자치구]])에 거주하는 재외 몽골인도 존재한다. 몽골인들의 모국인 몽골에서는 300만명 이상이 살며, 러시아의 재외 몽골인은 200만명 정도이다. 중국 내몽골 지역에 사는 몽골인들은 '''[[몽골족 (중국)|멍구족]]'''({{llang|zh|蒙古族}})으로 불리며 조선족과 유사하게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 기원 ==
[[탁발선비]]가 원거주지인 알선동을 떠난 뒤 ‘실위’가 출현할 때까지 어떠한 북방 종족도 대규모로 이동해오거나 갔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위]]인은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남아 있던 탁발선비의 잔여세력으로 탁발선비와 기본적으로 같은 원류라고 할 수 있다.<ref>장지우허 지음, 북방사연구팀 옮김(2009), 『몽골인 그들은 어디서 왔나』, 소나무,
60~73쪽</ref> [[실위]] 중에서 [[몽골족]]의 선조인 몽올실위는 《[[구당서]]》와 《[[신당서]]》 등에 기술된 20부 실위의 하나였다.<ref>《舊唐書》 권199, 「室韋傳」; 《新唐書》 권291, 「室韋傳」. 당대 한문사료에서 처음 등장한 몽올실위에 대해 중국 학계에서는 크게 두 종류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張久和와 林樹山 등은 수대 ‘심말달 실위’에서 나왔다고 본 반면에, 鄭英德, 劉光勝과 鄧國平 등은 ‘북실위’에서 몽올실위가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ref> 《구당서》와 《신당서》는 몽올실위가 망건하(望建河, 《신당서》는 室建河로 기록함)의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망건하는 지금의 [[아르군 강]] 및 [[헤이룽강]]에 해당된다. 이들은 본래 [[다싱안링]]의 서쪽인 아르군 강으로부터 헤이룽강 상류의 산림과 초원이 교차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9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실위인들이 대이동을 단행하자, 몽올실위도 수렵과 유목이 교차하는 곳인 헨티산맥의 [[오논강]] 유역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의 기원에 관해 [[라시드 앗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ref name="Manchu"/>
 
{{인용문|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종족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시켰던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두 가족은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구네 쿤이었다. 쿤의 뜻은 협곡이고 에르구네는 ‘가파르다’이니 곧 ‘가파른 산애(山崖)’를 의미한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ref>라시드 앗딘 지음, 김호동 역주(2002), 『부족지』, 사계절출판사, 252~253쪽</ref>
 
라시드 앗딘의 설명은 몽골족이 에르구네를 기반으로 성장해왔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몽올실위가 에르구네 일대에 거주했다는 한문 기록과도 일치한다.<ref>《新唐書》 권291, 「室韋傳」</ref> 몽골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보이는 한문 사료는 《구당서》「북적전(北狄傳)」으로 ‘몽올(蒙兀)’이라 했고, 《신당서》「북적전」에서는 ‘몽와(蒙瓦)’라고 했는데, 당시 음운 통례상 올(兀)과 와(瓦)는 같은 음이다. 요·금시대의 한문 문헌에서 ‘맹고(萌古)’<ref>《遼史》 권24, 「道宗本紀」24, 도종 4년조</ref>, ‘맹골(萌骨)’<ref>《金史》 권44, 志25, 兵制</ref>, '몽골(朦骨)'<ref>『大金国志』「皇統七年……是歳、朦骨国平。初、撻懶既誅、其子勝花都郎君者、率其父故部曲以叛、与朦骨通。兀朮之未死也、自将中原所教神臂弓手八万討之、連年不能克。皇統之六年八月、復遣蕭保壽奴与之和、議割西平河以北二十七團塞与之、歲遺牛羊米荳、且册其酋長熬羅孛極烈、為朦輔国主、至是始和、歲遺甚厚。于是熬羅孛極烈自称祖元皇帝、改元天興。大金用兵連年、卒不能討、但遣精兵、分拠要害而還」</ref> 등으로 표기되다가 12세기 말경에 ‘몽고(蒙古)’로 표기되기 시작한다.. 또한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칸]]의 뿌리가 되는 [[부르테 치노]]와 고아 마랄이 ‘텡기스(Tengis)’를 건너와 [[오논 강]]의 발원지인 [[부르칸 칼둔]]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여기서 ‘텡기스’는 [[튀르크어]]로 바다를 의미하지만, 내륙 한가운데 바다는 [[호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몽골인들은 큰 호수를 바다를 의미하는 ‘달라이(Dalai)’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텡기스’가 ‘쿨룬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ref>周淸澍(2001), 『元蒙史札』, 內蒙古大學出版社, 21쪽</ref> 다싱안링 서쪽지역의 에르구네(아르군 강)와 훌룬 부이르 초원에 거주하던 몽올실위가 [[카묵 몽골|몽골]]의 직접 조상이 된다는 것이 많은 사료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ref name="Manchu"/>
 
[[840년]], 위구르 제국의 멸망은 몽올실위를 비롯한 실위인들의 [[몽골리아]]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주한 실위인들은 당시 대제국을 건설했던 [[튀르크]]와 [[위구르]]의 선진문화와 유목경제를 흡수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것은 실위인들이 흥안령 서쪽의 에르구네하 일대에서 수렵과 약간의 [[목축]], [[농경]]을 하던 경제에서 기마 양 유목경제로 본질적인 전환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목경제로의 전환은 싱안링 일대의 수렵과 원시농경에 비해 보다 안정적인 생산을 보장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초원으로 이주한 수렵민은 유목민이 되었고, 이들의 기마 양 유목민화는 몽골 초원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몽골 초원이라는 생태환경에서 초원 기마 양 유목민으로 전환한 몽올실위는 향상된 기동력을 발판으로 크고 작은 부족 전쟁을 통해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몽올실위를 주체로 실위인들이 점차 몽골족
으로 응집되었고, 싱안링을 포함해 실위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했던 모든 지역은 [[몽골제국]]의 통치권 아래 흡수되었다.<ref name="Manchu">{{서적 인용|author=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authorlink=|title=만주 이야기|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305-5|page=54~57}}</ref>
==역사==
{{본문|몽골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