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디를레방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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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대전 ==
디를레방거는 1913년 10월 1일 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하여 독일제국 제13군단 예하의 "König Karl" 척탄병 123연대에서 기관총 사수로 복무했으며, 복무는 1년 간의 지원병 과정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에 이 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프랑스 전선에서 싸웠다. 그는 6차례 부상을 입고 [[철십자 훈장]] 2급과 1급을 받았으며 [[중위]] 계급으로 러시아 남부와 루마니아의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에서 중대를 지휘하던 중 종전을 맞았다. 적대 행위가 중단되자 디를레방거의 부대는 루마니아 지역에 억류되어 있도록 명령받았지만 디를레방거는 명령에 불복종하고 600명의 부대 병력을 이끌고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의 전기작가 Knut Stang은 "이 전쟁은 디를레방거의 향후 그의 생애와 '공포 전술'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한 요인이 되었다"고 쓰는데말하는데, "알코올 중독과 가학성애적 성향을 포함하는 그의 비도덕적 성격이 전선 체험에 의해 더욱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전간기 ==
당시 경찰 기록에서 디를레방거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며, 폭력광이자 알코올 중독자로, 약물에 취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경향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1차 대전 이후 그는 다양한 [[자유군단]] 계열 우익 민병대에 들어가 공산주의자나 폴란드인과 싸우거나 [[독일 11월 혁명]]을 진압하는 일에 참여했다. 나중에 그는 뷔르템베르크에서 "도로 감시" 명목으로 무장 학생 편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1921년 부활절 일요일에 디를레방거는 [[막스 횔츠]](Max Hoelz)가 이끄는 [[독일 공산당]] 계열 민병대가 습격하여 점령한 [[장거하우젠]]으로 이동하는 무장 열차를 지휘했다. 당시 적 민병대가 군대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며 디를레방거의 공격은 실패했으나, 밤에 친정부군이 증강되자 공산당 세력은 마을에서 철수했다. 이 작전 중 디를레방거는 머리에 스친 총상을 입었는데, [[나치당]] 집권 이후 "적색 테러분자로부터의 해방자"로 인정되어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면서도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괴테 대학교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하였고 1922년 계획 경제를 분석 비판하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다음해에 그는 [[나치당]]과 [[돌격대]]에 가입하였다. 1928년에서 1931년까지 그는 [[에르푸르트]]의 유대인 가족이 소유한 섬유 공장에서 전무이사로 일하며 돌격대 활동을 접었으나 돌격대에 금전적인 지원을 계속했는데, 그 자금 출처는 자기 회사로부터의 횡령일 가능성이 있다.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그는 [[하일브론]]에서 나치당 직책이던 직업 소개소 임원이 되는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디를레방거는 불법 무기 소지나 횡령으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34년에는 [[독일소녀동맹]] 소속의 14세 소녀를 강간한 것에 더하여 정부 차량을 유용하여 음주운전 중에 파손시킨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직장과 모든 명예를 잃은채 당에서 파면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이후 그는 유사한 범죄를 다시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곧 벨츠하임 수용소로 보내졌으나, 그의 전시 동료이자 [[친위대 본부]] 수장직을 역임한 나치당 간부로서 [[하인리히 힘러]]와도 오랜 친분이 있던 [[고틀로프 베르거]]의 사적 개입으로 풀려나 SS로 복직되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스페인 내전]]에서 [[콘도르 군단]]에 들어가 싸웠고,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복무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었다. 후원자 베르거의 도움으로 그는 스페인에서의 복무를 고려하여 범죄 전과를 재고해 줄 것을 청원하는 데 성공하였고, 더 높은 당원 번호이기는 했으나 나치당원 지위와 박사 직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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