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5월 3일 헌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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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법은 폴란드의 독특한 전통인 '[[귀족]] [[공화제]]'의 정치적인 결점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시민과 귀족([[슐라흐타]])이 정치적으로 평등하다고 규정했다. 또한 농민들이 정부의 비호를 받도록 규정했는데 특히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프로이센]]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동부 지역에서 악화되고 있던 [[농노제]]의 악습을 줄이도록 명시했다.
 
본헌법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의회의 여러 제도 중에서 부작용이 많았던 것을 폐지했는데 입법의 [[자유거부권|임의거부권]](리베룸 베토)도 폐지된 것이 특징이다. 이 헌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는 이해 당사자, 외국에 매수된 의원이 임의적인 거부권을임의거부권을 행사해서 의회에서 입법된 법률을 쉽게 취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헌법은 비교적 [[평등주의]]와 민주주의에 따른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여 복고적인 유력자들이 암약하던 [[무정부 상태]]의 원인을 개선한다고 규정했다. 본헌법은 [[리투아니아어]]로도 번역되었다.
 
현대의 기준에서도 매우 민주적이고 계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본헌법의 채택은 당시의 유럽 세계에서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판단되었고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변 국가들의 경계심을 끄는 전쟁을 초래하게 된다. [[1792년]] [[예카테리나 2세]]가 이끄는 [[러시아 제국]]의 공격을 받았고, 동맹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에게 배신당하며 패전하고 만다. 시대를 거치며 극단적으로 확대된 [[자유주의]]([[황금의 자유]])를 제한하고 [[공공의 복지|공공 복지]]를 강하게 내세웠던 본헌법에 따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던 폴란드의 몇몇 귀족들은 러시아와 결탁해서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했고, '우리의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군을 공화국으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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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까지 폴란드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을 '''대귀족'''([[마그나트]])들이 장악했다. 다시 말해 대귀족들은 자신의 특권, 즉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개혁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지배 체제를 만들었다. 이들은 다른 중소귀족과 정치적으로는 평등한 입장이었지만, 그 방대한 재산 때문에 대귀족으로 불렸고, 돈으로 중소귀족을 회유하여 자유주의를 확대하고 그 안에서 부를 [[과점]]해 나갔다. 이 시대는 신대륙에서 유럽으로의 곡물 수출이 본격화된 시기로 곡물의 시세와 [[임금 (경제학)|실질임금]]이 오랫동안 내림세를 보이면서 17세기 대규모 내전이 발생([[대홍수 (역사)|대홍수 시대]])했다. 이 때문에 정체된 국내 일반 [[소비재]] 생산은 장기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노동 조건이 점차 악화시켰다. 대귀족들은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 영지를 확대하고자 했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는 일반 농민들이 다시 농노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한 것으로 후에 [[재판농노제]]라고 불린다. 특히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 여러 동부 변방에서는 지방자치법 개악으로 일반 시민들의 살림살이가 다른 서구 국가들의 풍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또 일부 귀족들, 특히 리투아니아나 우크라이나와 같은 변경 지대에 영지를 가진 이들은 외세와 손잡고 중앙정부와 대립하면서까지 더욱 영지 확대에 나섰다.
 
많은 역사가들은 당시 폴란드가 몰락한 최대 원인은 [[자유거부권|임의거부권]](리베룸 베토) 제도에 있다고 지적한다. 임의거부권은 1652년 창설된 [[자유주의]]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제도로 국회([[세임(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세임]])의 모든 의원에게 모든 법안을 폐기할 권리를 인정했다. 어떠한 법안이든 표결 시에 의원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폐기되었다. 다만 17세기까지는 임의거부권이 사용되는 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귀족들의 연대감을 토대로 철저한 논의가 이루어져 만장일치로 법안 통과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귀족들 간의 [[소득격차]]가 커지면서 연대감이 상실되어 대귀족들, 외국에서 매수된 의원들, 지난 세기의 [[황금의 자유|황금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착각한 어리석은 의원들이 임의거부권을 남용하여 정부를 혼란스럽게 하고 마비상태에 빠뜨렸다. 그에 따라 임의거부권의 해악을 없앤 것이 임의거부권 적용에서 제외되는 '연합 의회' 창설이다. 이는 그동안 영국과 비슷한 관습법이 지배하던 폴란드 법 체계의 빈틈을 노리고 개최된 제2의 국회로 그 결정에는 법적 구속력이 있었다. 5월 3일 헌법을 채택한 1788년부터 1792년까지의 '[[4년 세임|4년 의회]]'(위대한 의회)도 연합 의회였기에 이렇게 급진적인 법이 통과될 수 있었다.
 
그런데 [[폴란드 왕국]]의 마지막 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치세([[1764년]]-[[1795년]])에는 폴란드에도 '''[[계몽시대]]'''가 오고 있었다.왕은 신중하게 개혁을 추진하였다. 재무부와 국방부가 창설되었고 국가 관세가 새로 정해졌다. 헌법 개혁도 철저히 논의되었다. 그런데 주변국들은 이 개혁을 위험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주변국들에게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는 중요한 나라였고 폴란드에서 중앙집권이 강화되고 민주화까지 되는 것을 자국 특권층의 이권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