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만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봇: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틀 부착 (근거 1, 근거 2)
편집 요약 없음
17번째 줄:
그러나,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와 《일본서기》의 목만치의 활동 시기가 서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목만치의 탄생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되는데,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討新羅時」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삼국사기》에 따르면 목라근자가 활약할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의 1년전, 3년전에 해당하는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일본서기》는 기록의 특성상 해외, 특히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대부분 「신라를 정벌하였다(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곤 하다.</ref> 더욱이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新羅本紀)3의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하자 근초고왕이 그들을 송환해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면서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임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서 366년과 368년에 맺어졌다는 백제와 신라 양국간 화친은 373년까지 깨어지지 않고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무턱대고 어느 한쪽의 기록만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ref>이희진은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신라본기」, 와 《일본서기》「신공기」의 관련 기록을 비교해보면 가야 지역 평정과 관련해 364년을 전후해 신라와 왜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점이 일치하는 반면에 《삼국사기》는 「364년 왜의 침공(신라측의 승리)→366년 백제와의 화친→368년 백제와의 화친」의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는 점, 《일본서기》는 「369년 신라 침공(왜의 승리)+가야 지역 평정」으로 신라와의 전쟁과 가야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점이 다르며, 《삼국사기》에 기술된 백제와 신라 양국의 화친과 《일본서기》의 신라 격파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이런 경우 《일본서기》보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이 더 정확하다는 전제하에, 「신라와 왜의 전쟁」과 「가야 지역 평정」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고 왜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물리치고 겸해서 가야를 평정했다」는 《일본서기》「신공기」의 기록과는 달리 「신라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다가 백제의 협조를 받아서 가야 지역을 평정했다」는 것이 되어 대단한 원정의 기록으로 어필되기 어렵게 되므로,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일본서기》 편찬방침상 대신라 전쟁(364년)과 가야 지역 평정(369년)이라는 두 가지 별개의 사실을 369년이라는 하나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몰아 기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희진, 『가야정치사연구』1998년, 학연문화사, p.60~62).</ref>
 
한문 기록의 특성상 「討新羅時 聚其國婦 而所生也」라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뭉뚱그려서 적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우선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기록된 369년이 한창 임나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던지역 와중이었다는관련이었을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ref>목라근자가 가야 지역을일부 지역에 군사활동을 평정하는하는 과정은 369년의 한 시점에서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들 목만치에게 세습될 정도로 꽤 장기간 유지되었던 굳건한 것이었다(이희진, 앞의 책, p.49). 한편 목라근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369년부터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475년까지의 시간 동안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 아신왕 12년([[403년]]) 가을 7월조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쳤다고 한 것이 유일하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2010년, 창작과비평사, p.119).</ref>
 
=== 「목만치」와 「소가노마치」 ===
23번째 줄:
 
# . 백제의 명문 씨족인 목만치가 굳이 자신의 성을 버리고 소가 씨를 자칭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점.
# . 일본에서도 도래계 호족이 자신의 출자를 일부러 위조하는바꾸는 것은 8세기 이후의 일이라는 점.
# . 목협만치가 「남쪽으로 떠났다」고 해서 그 「남쪽」을 굳이 왜국으로 지목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실제로 목협만치가 호종했던 문주왕은 왜가 아닌 신라에서 원병을 얻어 돌아왔다)
# . 소가노 마치의 손자는 소가노 고마(蘇我高麗)로서 고려(고구려)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는데, 백제의 명문 씨족이 굳이 「고려」라는 단어를 손자의 이름으로 지을 이유가 없다는 점.<ref>또한 소가노 마치의 아들 이름인 가라코(韓子)나 손자 고마(즉 소가노 이나메稻目의 아버지) 등의 이름이 단순히 「이국풍」이라는 점에서 소가노 마치가 도래인이라는 설의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소가 씨가 실은 도래인이었다, 고 말하는 설이 오히려 소가 씨를 「역적」으로 보았던 사관과도 맞아 떨어졌기에 넓게 퍼질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미즈타니 치아키(水谷千秋)의 지적도 있다. 또한 「가라코(韓子)」라는 이름은 《일본서기》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24년 가을 9월조의 주에「대일본인이 도나리(蕃)의 여자를 얻어서 낳은 것을 가라코라고 한다(大日本人娶蕃女所生為韓子也)」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한반도인과 왜인 사이의 혼혈아를 통칭하는 용어였다는 점에서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ref>
 
해당 제기된 의문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 . 목만지의 이름이 보이는 일본서기와 백제본기의 시대가 다른 이유는 이주갑인상 때문이다.
# . 소가노마치의 손자의 이름이 고구려를 뜻하는 고려인 이유는 백제왕계의 기원이 고구려이기 때문.
# . 도래계 호족이 자신들의 출자를 바꾸는 것은 8세기 이전에도 존재한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