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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Carte Lycie.png|thumb|thumb|255px|고대 그리스 인에게 알려진 리키아의뤼키아의 위치]]
'''리키아뤼키아'''([[그리스어]]: Λυκία) 또는 ''뤼키아''는오늘날 터키의[[터키]]의 남동 해안의 안탈리야와[[안탈리야]]와 무글라에[[무글라]]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그리스]]의 도시이다. [[로마 제국]] 성립 후 속주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이집트]]의 기록은기록에서는 리키아인을뤼키아인을 [[히타이트]] 연맹으로연맹이라고 기술하였다나온다. 리키아는뤼키아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 [[아수와]] 동맹의 구성 국가였는데 루카로'루카'로 나타난다.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후, 리키아는뤼키아는 독립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부상하였다. [[헤로도투스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리키아는뤼키아는 [[아테네아테나이]]의 [[판디온 22세]]세의 아들인 [[리쿠스뤼코스 (신화)|리쿠스뤼코스]]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졌다지었다고 한다. 고대에고대에는 이 영역은 한나라로한 나라로 통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하게않았으며, 독립적인 도시국가의도시국가들이 단단하게굳게 짜인결속한 동맹으로 남았다이루어져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트로이트로이아 전쟁]]에서 리키아는뤼키아는 두 존경받는 전사 [[사르페돈]]과 [[글라우쿠스글라우코스]]의 지휘아래지휘 아래 [[트로이트로이아]] 편에서 싸웠다고 한다.
다른 [[그리스 신화]]에는 리키아 왕국은 다른 [[사르페돈]]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한다. 그는 [[크레테]]에서 왔으며 [[미노스]] 왕의 형제이다. 사르페돈의 추종자들은 터밀레라 불리었으며 그들이 밀리안이라 불리는 민족을 정복후에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크레타]] 조직의 [[밀레투스]]의 창건과 함께 소아시아에 정착을 의미한다. 리키아는 그리스 신화에 [[벨레로폰]]의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그는 결국 리키아 왕 이오바테스(또는 암피아낙스)의 왕좌를 계승하였다.
 
다른 [[그리스 신화]]에는 리키아뤼키아 왕국은 다른 [[사르페돈]]에 의해 지배되었다고지배하였다고 한다. 그는 [[크레테]]에서 왔으며 [[미노스]] 왕의 형제이다. 사르페돈의 추종자들은 터밀레라 불리었으며 그들이 밀리안이라 불리는 민족을 정복후에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크레타크레테]] 조직의 [[밀레투스밀레토스]]의 창건과 함께 소아시아에 정착을 의미한다. 리키아는뤼키아는 그리스 신화에 [[벨레로폰]]의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그는 결국 리키아뤼키아 왕 이오바테스(또는 암피아낙스)의 왕좌를 계승하였다.
리키아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의 통제 아래로 왔다. 그때 [[메디아]]의 하르파구스는 [[키루스 대왕]]의 장군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정복하였다. 하르파구스의 후손이 [[기원전 468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때 아테네가 그들을 무너뜨렸다. 그후 페르시아는 기원전 387년 다시 점령하였고 [[마케도니아 왕국|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유지하였다. 그것은 곧 [[셀레우코스 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기원전 189년]]에는 [[공화정 로마|로마 공화국]]에 떨어졌다.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4년]]에 그곳에서 피살되었다. [[43년|서기 43년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리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병합하며 그것을 팜필리아와 통합하였다. 리키아는 결국 그리스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어 [[터키]]의 일부가 되었다.
 
리키아는뤼키아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의 통제 아래로 왔다. 그때 [[메디아]]의 하르파구스는 [[키루스 대왕]]의 장군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정복하였다. 하르파구스의 후손이 [[기원전 468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때 아테네가 그들을 무너뜨렸다. 그후 페르시아는 기원전 387년 다시 점령하였고 [[마케도니아 왕국|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유지하였다. 그것은 곧 [[셀레우코스 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기원전 189년]]에는 [[공화정 로마|로마 공화국]]에 떨어졌다.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4년]]에 그곳에서 피살되었다. [[43년|서기 43년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리키아를뤼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병합하며 그것을 팜필리아와 통합하였다. 리키아는뤼키아는 결국 그리스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어 [[터키]]의 일부가 되었다.
리키아는 트리밀리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것은 파타라 발굴에서 고대 도로 표지판에 발견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디르밀이라는 [[터키]] 마을이 고대의 트리밀리 즉 리키아로 판명되었다.
 
리키아는뤼키아는 트리밀리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것은 파타라 발굴에서 고대 도로 표지판에 발견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디르밀이라는 [[터키]] 마을이 고대의 트리밀리 즉 리키아로뤼키아로 판명되었다.
2세기의 대화록 에로테스는 리키아가 그들의 기념비보다는 그들의 이전 영광을 포함하므로 역사가 흥미롭다고 하였지만 리키아의 유적에서 많은 유물들이 특히 그들 특유의 절벽 측면의 바위를 깍아만든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2세기의 대화록 에로테스는 리키아가뤼키아가 그들의 기념비보다는 그들의 이전 영광을 포함하므로 역사가 흥미롭다고 하였지만 리키아의뤼키아의 유적에서 많은 유물들이 특히 그들 특유의 절벽 측면의 바위를 깍아만든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리키아는뤼키아는 여신 [[레토]]와 그녀의 쌍둥이 아이 [[아폴론|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숭배의 중심이었다
 
==리키아뤼키아 연맹==
리키아뤼키아 연맹(코이논)은 [[기원전 168년]]에 민주주의 원칙으로 결성되었다. 그것은 23개의 알려진 도시국가를 구성원으로 한다.
 
리키아는뤼키아는 [[기원전 188년]] 아파메아의 평화에서부터 [[로도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마케도니아 전쟁|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결과 로마에 의해 독립하게 되었다. 이들 도시 국가들은 연방 형태의 정부로 참여되었다. 그것은 더 큰 나라에 대해 정치적인 자원을 공유하였다. “리키아르크”는“뤼키아르크”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매해 가을 다른 도시에서 소집된다. 해당 도시에 각 구성원은 도시 크기에 따라 1명에서 3명의 대표를 상원 즉 불류테리온에 보냈다. 연맹의 주요 도시는 [[크산토스]], [[파타라]], [[피나라]], [[올륌포스]], [[뮈라]]와 [[틀로스]]가 있었는데 파타라가 수도였다. [[파셀리스]]는 나중에 연맹에 참여하였다. 연맹은 [[46년|서기 46년]] 로마 속주가 된 후에도 계속 작동하였다. 리키아는뤼키아는 4세기에 연방이 사라졌다. 그 때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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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의 역사적 영역}}
 
[[분류:리키아뤼키아| ]]
[[분류:아나톨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