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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28년(1549년) 무거시(武擧試)에 합격하였고, 가정 32년(1553년) 등주위지휘첨사(登州衛指揮僉事)로 시작했다. 가정(嘉靖) 34년(1555년) 절강도사첨서(浙江都司僉書), 다음 해에 참장(參將)으로 승진했다. 1555년(嘉靖 34년)부터 [[절강성]]에서 왜구의 침입에 맞서 항왜(抗倭)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절강성]](浙江省) [[진화 시|금화]](金華), [[이우 시|의오]](義烏)에서 농부와 광부 등으로 4000명의 의용군을 조련하였다. '척가군(戚家軍)'이라 불린 이들에게 공방합일의 원앙진(鴛鴦陣)을 훈련시켜서 왜구토벌의 주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수군(水軍)을 조직하여 중국 남동부의 해안 지역에서 밀무역(密貿易)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토벌에 나섰다.
 
그 뒤 1567년까지 10여년 동안 왜구와 80여 차례나 전투를 벌이며 [[왜구]]를 물리쳤다. 1561년(嘉靖 40년), 그는 절강성 태주(台州), 선거(仙居) 등에서 왜구와 9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모두 승리하였다. 1562년에는 복건성(福建省)의 왜구 근거지를 소탕하였고, 그 공으로 도독첨사(都督僉事)가 되었다. 1564년(嘉靖가정 42년43년(1564)에는, 평해위(平海衛, 지금의 福建省 莆田)에서 [[왜구]]를왜구를 물리쳐 도독동지(都督同知)를 거쳐 복건총병(福建總兵)이 되었다. 그 뒤에도 척계광은 복건성과 광동성(廣東省) 연안에서 [[왜구]]와 전투를 벌여 중국 동남 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75142&cid=40942&categoryId=34333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척계광 [戚繼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nowiki>]</ref>
 
1567년에 해금령이 풀리면서 왜구의 활동이 뜸해지자 융경(隆慶) 2년(1568년) 계주(薊州)로 배치되어 [[알탄 칸]]의 위협에 대비해 국경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 때 대규모의 만리장성 보강, 증축 공사를 실시하였다. 척계광은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을 보강하여 공심적대(空心敵臺)와 보(步), 기(騎), 차(車), 치(輜), 중(重) 등의 영(營)을 세웠고,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활약으로 내각대학사로 당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장거정]](張居正)에게 중용되었지만, [[1582년]] 장거정의장거정 사후, 척계광의 공적을 시기하는 대신들로부터 탄핵되어 만력(萬曆) 11년([[1583년]]) 광동으로 배치되었다가, 나중에 파직되어 등주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 병사했다.<ref>明史, 戚繼光傳</ref>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