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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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2차대전 종전 이전)에 쓰다는 '천황', '황국'사관의 속박을 타파하려 '국가신도의 경전(神典)'으로 이용되는 기키에 날카로운 사료비판을 행하고 기키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기초를 구축하였다<ref name=tinn>沈(2003)</ref>. 전후의 학자는 기키의 연구를 이어가서 그 문제점, 사료가치에 대한 분석을 진전시켰다. [[전후]] 일본의 역사학에서는, 전전의 황국사관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기키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진일보하였으며, 그 결과 학계의 주류에서는 '삼한정벌'에 관한 기술은 구체적이지 않고 신화적 과장이 다분한<ref name=tinn/>「三韓征伐神話は当時の新羅の状況と合わない」<ref name=tinn/>등, 진구 황후의 실재여부 또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여부에 대해서는, [[광개토대왕릉비]], [[칠지도]] 등, 일본서기가 아닌 당대사료에 의해 논의하게 되었다.
 
어느 시기에는, 현재의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은 [[일본 육군]]이 [[대일본제국]]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찬한 것이라는 설이 강한 힘을 얻었으나([[이진희]](李進煕) 와코대(和光大) 명예교수의 설), 현재 이 학설은 대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호태왕비의구일본육군이 입수한 가장것보다 오래된 탁본호태왕비 발견탁본이 발견되었는데 구일본육군 입수입수본과 이전과 일치일치하였다, '개찬논쟁에 종지부' [[요미우리 신문]] 2006년 4월 12일 12면). 또 [[4세기]] 후기 무렵부터 [[왜국]]([[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기록을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호태왕비문도, 통설에 입각한 독법에 한정되어, 비문에 있는호태왕비문에서 왜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켜 고구려와 격렬히 싸우게 되었다는 것도서술이 '공적을 크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 있다고 해도 대강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평가가 일본학계에서 정착되는 경향이 있다. 또 중국사서([[송서]] 등)의 기술을 근거로,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소국가군에 대해서 어떤어떠한 형태의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방증하는 견해도 있으며, 한국측의한국 측의 사서 <삼국사기>에서도 거듭되는 왜의 침공이나 신라와 백제가 왜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한국 남부 지역의 [[전방후원분]] 발굴조사에서 왜국산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된 것도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 200년 무렵을 배경으로 한 '삼한정벌' 설화를 한반도 진출설의 근거로서 신용하지는 않는다 해도, 4세기 후반 이후 왜의 한반도 진출진출에 자체는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할수입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한국측 자료자료와의 차이((일본서기에일본서기와 비해비교하여 해당 시기의 [[편년]]이 다른 부분다르다(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의 [[간지]] 년이 1년 차이나는차이가 정도난다)), 또한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문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편린이 엿보이는 것))에서는,엿보이는데도 '오키나가나라시히메 또는 왜의 여왕의 내습'등의 기술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기키에 기록된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그 자체는 의심스러운 것이라 할 것이다.
 
기키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고구려]] 등과의 격렬한 전투를 전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사실로 인해, 이 무렵의 일본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문자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이 무렵의 <일본서기>의 대외관계 기사에서는, 추정간지를 120년 끌어내려리는끌어내리는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기사가 있고, 그마저도 [[백제삼서]]라고 불리는 한국측의 사료에 기초한 것으로 추정되어, 일본 고유의 전승은 불충분하고 모자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결국 삼한정벌설은, 아득한 후대가 되어, 신라의 일본에 대한 복종을 정당화하기 위해([[속일본기]]에서는, 내빙한 신라 사신의 면전에서 진구황후의 전설을 들려주어 분노를 샀다는 기사도 있다), 일찍이 일본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 희미한 기억과,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신라 원정을 위해, 쓰쿠시 아사쿠라궁(筑紫 朝倉宮)까지 거동한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면서, 진구황후 전설이 창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 설)<ref>直木孝次郎『神話と歴史』(2006年吉川弘文館)</ref>.
 
==== 삼한정벌 전설의 성립과 야마토 조정의 대외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