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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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ref name="운구1">[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2&C_CC=AC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ref>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ref name="운구1"/>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 name="운구1"/>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된다며 반발하였다.<ref name="운구1"/>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ref name="운구1"/> [[박정희]]는 정부가 국민장으로 양해했으면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개인장으로 지내겠다면 내버려두라며 역정을 냈다.<ref name="운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