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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랑(司馬朗 : 171~217)
 
[[사마의]]의'''사마랑'''(司馬朗 형.사마랑은: 171~217)은 자가 백달(伯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사람이다.
[[사마랑]]의사마랑의 부친은 [[사마방]](司馬防)으로 자가 건공(建公)이다. 성격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공정하였고, 한가하게 있을 때도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평소 《[[한서]]》〈[[명신열전]](名臣列傳)〉을 좋아하여 수십만 번 낭송하였다. 젊어서 주와 군의 관리가 되었고, [[낙양]]의 령(令)ㆍ경조의 군(君)을 역임했는데, 말년에 기도위로 전임되었다. 그는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았다. 자식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르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 71세([[건안]] 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여덟 명 있었는데 [[사마랑]]이 장남이고, 차남이 진선황제(晉宣皇帝)이다.
 
[[사마의]]의 형.사마랑은 자가 백달(伯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사람이다.
 
[[사마랑]]의 부친은 [[사마방]](司馬防)으로 자가 건공(建公)이다. 성격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공정하였고, 한가하게 있을 때도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평소 《[[한서]]》〈[[명신열전]](名臣列傳)〉을 좋아하여 수십만 번 낭송하였다. 젊어서 주와 군의 관리가 되었고, [[낙양]]의 령(令)ㆍ경조의 군(君)을 역임했는데, 말년에 기도위로 전임되었다. 그는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았다. 자식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르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 71세([[건안]] 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여덟 명 있었는데 [[사마랑]]이 장남이고, 차남이 진선황제(晉宣皇帝)이다.
[[최염]]과 친했다.
사마의 형제는 모두 뛰어나서 [[사마팔달]]이라 불리었다.
정사에서는 후한의 사도-순상과 더불어 명사 중의 명사로 꼽힌다
 
== '''생애''' ==
 
[[건안]] 22년(217)에 [[사마랑]]은 [[하후돈]]ㆍ[[장패]] 등과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거소(居巢)에 도착했을 때, 군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크게 퍼져 [[사마랑]]은 친히 순시하고 의약품을 보냈다.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는데, 이때 나이가 마흔일곱이다. 그는 임종하면서 [[베옷]]과 비단 두건으로 계절에 맞는 상복을 입히도록 명했다. [[명제]]가 즉위하여 [[사마랑]]은 아들 [[사마유]](司馬遺)를 창무정후(昌武亭侯)로 봉하고 식읍 1백 호를 주었다. [[사마랑]]의 동생 [[사마부]](司馬孚)는 또 아들 [[사마망]](司馬望)으로 [[사마랑]]의 뒤를 잇게 했고, [[사마유]]가 죽자 [[사마망]]의 아들 [[사마홍]](司馬洪)이 뒤를 이었다.
 
[[사마랑]]은사마랑은 죽음을 앞두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사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만리 밖으로 감독하는 사람으로 왔지만, 공업(功業)을 나타내지 못하고 병들었소. 스스로 구할 수 없는 것은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오. 이 몸이 죽으면 [[베옷]]과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입히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혀 절약하도록 하오. 나의 뜻을 어기지 마시오."
 
[[분류:171년 태어남]]
[[분류:217년 죽음]]
[[분류:한나라 사람]]
 
[[zh:司馬朗]]
[[사마랑]]은 죽음을 앞두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사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만리 밖으로 감독하는 사람으로 왔지만, 공업(功業)을 나타내지 못하고 병들었소. 스스로 구할 수 없는 것은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오. 이 몸이 죽으면 [[베옷]]과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입히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혀 절약하도록 하오. 나의 뜻을 어기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