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도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그러다 1907년 평양에서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하던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길선주는 당시 목사 안수를 받기 바로 직전에 그는있었던 다음과길선주는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개를 대중 앞에 하게 된다.
 
{{인용문2|"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br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br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ㅁ라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br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br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br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br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길선주|1907년 1월 6일 장대현 교회에서<ref>{{틀:서적 인용|저자=김선주|제목=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출판사=삼인|발행년도=2009|쪽=p.220-221}}</ref>}}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부흥 집회와 구국기도회로 [[평양대부흥|평양 대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회개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오면서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부흥 집회와 구국기도회로 [[평양대부흥|평양 대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남강 이승훈|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는데, [[김병조 (1877년)|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 참가하지 않은 네 명의 민족대표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