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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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청주시|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와 호조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죽었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
 
[[1612년]] 60세 때에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64세에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그해 가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ref name="경향신문"/> 묘갈명은 정경세가정경세(鄭經世)가 썼다.
묘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산481-1
 
=== 사후 ===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은 효종때 [[우의정]]을 역임했고, 아우 [[한준겸]]은 [[인조]]의 국구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고 조카딸이 왕비에 오르면서 한백겸은 뒤에 [[영의정]]에영의정에 추증되고 자신이 세웠으며 [[원천석]]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그 자신도 배향된다.<ref name="경향신문"/>
 
== 학문적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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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수록]]》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쓴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것이,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고 격찬하며 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f name="경향신문"/>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구암유고 동국지리지》서문에서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학자)|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묘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산4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