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히데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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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노부나가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긴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사쿠마 노리마사]]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자, [[셋쓰 국]] [[이바라키 성|이바라키]] 5만석의 영주로 대를 잇는다. 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였고,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웠기 때문에 [[하리마 국]] [[미키 성|미키]] 6만 5천여석에 가증이봉된다.
1587년 [[규슈 정벌]], 1590년 [[오다와라 정벌]], 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매사냥 중 자격의 습격을 받아 암살되었다. 향년 25세였다. 매사냥 중 암살되었던 탓에 히데요시의 질책과 영지가 몰수될 것을 우려해 은폐했지만, 도리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화를 돋구었다. 하지만,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의 공적을 고려해 동생 히데시게로의 영지 상속을 윤허했다. 단,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평수정(平秀政/平秀正)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응인]]의 서장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 [[명나라|명]]에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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