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베레고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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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여 [[에디트 크레송]] 총리가 사임하자 그는 후임 총리로 지명되었다. 실업, 경기침체, 부패와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국회에서 한 취임 연설에서 그는 그의 정적인 우익 정치인 중 부패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다. 대대적인 부패 척결 정책을 추진했으나, 오히려 그 자신이 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3월]] 총선에서 그와 사회당에 대한 인기는 크게 떨어져 사회당은 의석을 많이 잃으며, 원내 제3당으로 추락했다. 이에 따라 그가 이끄는 사회당 내각은 붕괴되어 그는 총리직에서 바로 물러났다.
 
곧 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직위를 이용하여 사업가 친구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의 혐의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의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실제로는 고위 공직자면서도 청렴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빌린 돈은 원금을 나누어 갚아서 법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는 총선 패배에 따른 죄책감과 조사에 따른 중압감, 자신을 연일 비난하는 언론에 대한 수치심으로 심한 상실감에 시달렸으며,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불과 2개월 여 만인 [[5월 1일]], 자신의 지역구이자 자신이 시장으로 있는 니에브르 현 느베르에서 자신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곧바로 [[헬리콥터]]로 [[파리 (도시)|파리]]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느베르에서 소박하게 치러졌으며, [[프랑수아 미테랑|미테랑]] 대통령은 그의 죽음에 대해 크게 안타까워 하며, 언론의 비난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여겨 언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었다.
 
{{프랑스의 내각 수반}}
{{토막글|프랑스}}
{{토막글|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