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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차 무역 독점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의 막대한 차 소비량은 연간 1인당 1파운드 가까이 된다. 비슷한 시기, 인도지역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삼 지역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어 현지에서 대규모 차나무 [[플랜테이션]]을 경작하기 시작하였다. 1870년, 영국에서 소비되는 차의 90% 이상이 여전히 중국이 원산지였으나, 1900년 무렵 중국산의 비율은 10% 대로 낮아지고 인도산(50%)과 스리랑카산(33%)으로 광범위하게 대체되었다.
 
인도 내에서의 차 소비량은 영국이 소유한 인도 차 협회가 20세기 초 펼친 적극적인 홍보 캠페인 전까지는 낮은 상태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홍보정책은 공장과 광산, 섬유공장들이 노동자들에게 차를 마시는 휴식시간(tea breaks)을 제공하도록 장려하였으며, 당시 급속히 늘어나던 철도역 도처에 "짜이“짜이 왈라"라고왈라”라고 불리는 일인 짜이 노점상들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공식 홍보 캠페인 당시의 차는 소량의 우유와 설탕이 첨가된 영국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당시 찻잎의 가격은 비싼편이어서, [[짜이왈라짜이 왈라]]들은 차에 향신료를 더하고 우유와 설탕의 비율을 크게 늘려 전체적으로 찻잎의 사용량을 줄이는 방법으로 가격을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초기에 인도 차 협회는, [[짜이왈라짜이 왈라]]들의 이런 경향에 반대했다. 그러나 인도 차협회의 비판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마살라 짜이는 현재와 같은 형태로 자리잡아 인도뿐만 아니라 남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며 인기있는 음료의 반열에 올랐다.<ref>Collingham, Lizzie. (2006). "Chai: The Great Tea Campaign". In ''Curry: A Tale of Cooks & Conquerors'', pp 187-214.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ref>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