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 스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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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AURAL sTEIN.jpg|thumb|300px|[[1929년]] 중앙 아시아에서 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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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를 세번이나 탐사를 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했으며, 특히 돈황의 유적지를 연구한 사람으로 돈황 막고굴의 존재를 유럽의 학계에 알려 '[[돈황학]](敦煌學)'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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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고 있던 태청궁의 도사 [[왕원록]]이 막고굴 제16굴에서 숨겨진 작은 방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17로 알려진 장경동이며, 이곳에서 약 5만점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당시의 서구 열강의 각축과 내부 분란, 부패 등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청나라]] 정부와 지방 관리들은 왕원록의 탐사 활동에 대해 무관심했다. 도사 왕원록은 고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유물 보존을 위해 엄청난 발품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어떤 관리도 인적인,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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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동의 보물에 대한 소문을 들은
무엇보다도 스타인이 세운 공적은 [[8세기]]의 고구려계 [[당나라]] 명장 [[고선지]]의 업적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 폴 펠리오와 오타니 고즈이 ==
[[그림:Pelliot.jpg|thumb|250px|장경동의 문서를 조사하는 폴 펠리오]]
1년 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도 비슷한 금액을 지불하고,
당시에 이런 대량의 유물 유출을 두고, 현재의 중국은 유물도둑이라고 분개한다. 하지만 당시 왕원록이 유물 보존을 위해 400킬로미터를 여행하며 지역의 관리들과 교섭, 담판을 하며 다녔던 노력과, [[문화혁명]] 당시 둔황의 상당수 유물들이 [[홍위병]]들에게 파손되었던 광란의 역사는 말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중국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은 유물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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