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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2 /> 당시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ref name="강원룡1">[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2.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당시 한국에는 지주제도가 확산되었고 지주제도는 통상 총독부와 관련이 깊었다. 대도시, 특히 대구와 서울에서는 교사 등의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난하거나 내심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교수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컸다. 박정희와 그의 형제들은 대구 근방의 기차 정거장인 구미 근처에 사는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김종필과 여섯형제는 대전 인근의 부여 근처에 사는 중간 규모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의 부모는 김종필이 어릴 때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두 사람은 총명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국가적인 상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개인과 국가의 진로를 폭력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것이다. <ref name="프레시안" />
박정희는 일찌기 대구에 있는 사범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박정희를 가르쳤던 교사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전 북한 외교 통상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학생들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절친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왕학수와 황용주 같은 박정희의 급우나 김종필의 친구들이 지금 박-김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ref name="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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